[수요 프리즘]장훈/선거운동 같은 국정운영

  • 입력 2003년 5월 27일 18시 27분


코멘트
얼마 전 미국 방문으로 한숨 돌렸는가 싶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후 잇따라 터진 사회적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슬 퍼렇게 시작됐던 김영삼, 김대중 정부와 달리 임기 초반부터 다소간 혼란에 시달리고 있는 새 정부를 지켜보면서, 필자는 대통령제 정부에 대한 연구서들을 새삼스레 꺼내 다시 살펴보았다. 어떤 책은 대통령 개인의 스타일과 리더십을 강조하기도 하고, 어떤 연구서는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 혹은 대통령과 이익단체와의 관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연구서들이 요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혼란을 명쾌하게 설명해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고정 지지자’만 좇다간 혼란 ▼

필자의 생각으로 요즘 노 대통령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틀은 민주국가의 대통령이 흔히 처하게 되는 ‘국정운영(governing)’과 ‘선거운동(campaigning)’ 사이의 긴장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지난해 월드컵을 계기로 달아오른 민족주의의 열기가 노 대통령의 당선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민족주의가 취임 이후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추구하는 대통령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최근 전교조, 화물연대와의 갈등에서 보듯이 정부의 정책방향이 지지세력과의 충돌에 대한 우려 때문에 번복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정부의 정책결정에 대한 신뢰와 권위가 떨어지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처럼 국정운영과 선거운동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한쪽이 다른 한쪽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빚어지는 일은 아니다. 최근 이라크전쟁을 신속하게 끝냄으로써 기세가 오른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을 자신의 재선운동에 이용하고 있다는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미국 전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부시 대통령이 전투기를 타고 항공모함에 내려 종전 선언을 한 것은 군 통수권자로서의 국정운영이라기보다 내년 선거를 겨냥한 사전 ‘불법 선거운동’이라는 비판이 미국 언론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노 대통령이 임기 초반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서, 요즘 각계에서 실로 다양한 주문이나 권고가 쏟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필자가 한 가지 보태고 싶은 것이 있다면, 국정운영과 선거운동이 전적으로 분리될 수는 없지만, 국정운영 과정에서 굳이 지지자와 반대자,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고 이들의 반응을 예민하게 재는 것이 사실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대통령이 지지세력 만의 대통령이 아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원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다. 대통령의 방미외교에 대한 지지도가 60%를 훨씬 상회했던 데서 보는 것처럼, 또한 지난 대선에서 노 대통령에게 절반의 지지를 보냈던 40대 유권자들의 대통령 지지도가 최근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는 데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 대통령과 정부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는 내 편과 네 편이 확고하게 고착되어 있는 닫힌 세계가 아니다. 사안에 따라, 또한 정부 정책결정의 내용과 방식에 따라, 정부에 대한 지지가 쉼 없이 유동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달리 말해 지역주의에 갇혀 있던 양김 시대의 유권자들과 달리, 요즘에는 정부의 결정을 면밀하게 지켜보면서 이것이 자신들의 상식에 부합하면 지지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가차 없이 비판하는 깨어 있는 유권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유권자는 사안따라 판단할뿐 ▼

이러한 열린 환경에서 고정적인 지지세력을 붙잡아 두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정책결정은 궁극적으로 정부의 국정운영뿐 아니라 선거운동까지도 위험에 빠뜨린다. 정부의 정책결정이 몇몇 이익집단의 조직화된 힘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이 반복될 때 정부의 권위는 실종되고 조직화되지 못한 다수는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지지층의 결속만으로 충분하던 편안한 시대는 지나갔으며 오늘날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것은 사회 전반의 흐름을 끊임없이 살피는 열린 자세다. 특히,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중간층의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가를 꾸준하게 헤아리는 것만이 요즘의 혼란을 벗어나는 길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