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관/‘울고 싶은데 뺨 때린’ 美軍 재배치論

  • 입력 2003년 3월 23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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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고위 관계자는 올해 초 한국 내 지인들에게 국내의 반미 분위기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나의 최대 임무 중 하나는 주한미군 3만7000명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특히 기술개발로 늘어난 북한의 재래식 장거리포 사거리(30∼40㎞)에서 미2사단 병력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경기 평택 이남으로 미2사단을 재배치할 필요가 있지만 한국에 줄 경제적인 충격 등 때문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한국 내 반미 분위기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매우 완곡한 이 주한미군 관계자의 발언에는 최근 미 국방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으로 점화된 주한미군 재배치 논의에 대한 미국측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국민이 원치 않는데 있을 이유가 없다’는 메시지다.

실제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재배치 논의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신(新)국방전략’의 연장선에서 본격 검토돼온 것이어서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최근 불거진 주한미군 재배치 논의가 우리 쪽 사정과는 관계없이 ‘미국이 울고 싶은데 한국이 뺨 때려준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작년 말 이후 미국 쪽에서 여러 채널을 통해 메시지가 전달됐는데도 한국 쪽에서 ‘미국과의 이견’을 강조하는 목소리만 높았던 것도 주한미군 재배치 논의를 앞당긴 한 원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올 초 미국을 방문해 공화당의 핵심인사들을 만나고 돌아온 한 여권인사도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했다.

“국내의 미군철수 주장과 반미 분위기에 부시 행정부의 핵심인사들은 예상 밖으로 강경한 반응이었다. 최소한 주한미군을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하겠다는 의지만은 분명했다. 이는 ‘남북한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제 당신들끼리 싸워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그는 “미국 공화당 행정부의 이런 분위기의 저변에 노무현(盧武鉉) 행정부의 외교노선을 ‘미국 이탈’로 보는 시각이 깔려있기 때문”이라며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얘기를 공론화하기 어려운 정권 핵심 내부의 분위기”라고 지적했다.

실제 기자가 이달 초 일본 경단련(經團連) 초청으로 방일했을 때 만난 한 한반도전문가도 “일본 내에서는 한국 새 정권의 ‘신민족주의적’ 경향을 50년간의 해양세력 중시정책에서 대륙국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아무튼 ‘당당한 대미외교’를 강조해온 노 대통령은 미국의 대(對)이라크전을 발빠르게 선언하고 나서면서 현실주의자로서 변신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라인의 한 관계자는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대미 외교노선이 ‘현실에 바탕을 둔 낭만주의’였다면 노 대통령의 노선은 ‘낭만적 현실주의’”라고 평했다.

노 대통령은 21일 저녁 박관용(朴寬用) 국회의장 및 각당 대표와 가진 청와대 만찬회동에서는 “북핵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미군 철수 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잘 대처하겠다”고 거듭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건은 이라크전 이후 다시 북핵 문제와 대미 문제로 돌아갔을 때 노 대통령이 어떤 정합(整合)성을 가진 외교논리로 자신의 변신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라크전 지지에서 보여준 변신의 행보는 결국 ‘상황돌파’를 위한 임기응변의 카드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도 유효한 외교협상전략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일리가 있는 논리다. 그러나 한 외교 관계자는 “‘달러 사재기’가 빚어지고 이라크전 와중에 다른 나라에서는 달러가 약세인데 유독 한국만 강세를 보이는 현상의 배후에 ‘이라크전 이후’ 한반도 정세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동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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