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상인/保守, 위축돼선 안된다

  • 입력 2003년 1월 2일 18시 13분


지난해 12월 대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했다. 만약 그것이 단순한 정권교체에 그쳤다면 패배자의 깨끗한 승복과 함께 국민은 나름대로 5년 뒤를 생각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지난 선거는 그런 통상적인 정치과정이 아니었다. 대신 그것의 성격은 일종의 신사회운동 또는 ‘문화혁명’에 가까웠던지라 선거 후유증 역시 관행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사안의 핵심은 특정 후보의 당락이 아니라 그것이 차지하는 거시역사적 혹은 사회구조적 함의인 것이다.

▼성찰과 혁신 통해 거듭나야▼

무엇보다 가시적으로 확연해진 현상은 세대간 권력이동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한 기술적 원동력은 정보혁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각성과 사회적 동원은 더욱 심각한 원인을 갖고 있다. 그것은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 기성체제를 향한 부정과 주류사회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자라나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강자와 부자 및 식자(識者)에 대한 반사적 적대감이 팽배한 마당에 보수의 설 땅이 넓고 편할 리 없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나 좌파 진영의 후보가 50% 이상을 득표하지 않았던가.

보수 퇴조의 일차적인 책임은 물론 자기부담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집권세력들의 도덕적 불감증과 잇따른 부정부패를 감안하면, 그러면서도 건국 이후 지금까지 그들이 천연덕스레 구가해 왔던 태생적 특권의식까지 고려하면 ‘수구·반동 집단’이라는 불명예에도 일리가 없지 않다. 그러나 보수의 위기가 곧 보수의 존재 이유를 의심케 할 수는 없다. 혁명적 변화와 진보의 시대가 예고되는 이 시점에서 자기성찰과 자기혁신을 통한 진정한 보수의 역할은 오히려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우선 보수는 공동체의 기본을 회복하고 품격을 향상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초등학생이 반미 혈서를 쓸 정도로 현실은 거칠어졌고, 성직자들이 ‘화형식’을 주동할 정도로 세상은 황량해졌다. ‘컴맹’이 사라지는 대신 사실상의 ‘문맹(文盲)’이 늘어나면서 인터넷 시대의 반문명적 행각에도 고삐가 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하 우리 사회에는 교육과 윤리를 논하는 것이 점점 더 고약해지고 있다. 대신 젊은 세대에 영합하고 편승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민주주의가 중우(衆愚)정치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면 후대를 가르치는 보수 본연의 역할은 결코 위축될 수 없다.

또한 보수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시민정신과 합리적 개인주의를 담보하는 기능을 적극 자임해야 한다. 모두가 ‘붉은 셔츠’를 입고, 모두가 ‘노란 풍선’을 들며, 또한 모두가 ‘촛불 시위’에 참가하는 것 자체는 필요에 따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치자. 문제는 그러한 감성적 집단주의가 최근 일상화되고 내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질식시키고 개인을 개체적 시민이 아닌 익명적 군중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의 미래를 오도(誤導)할 개연성을 포함한다.

덧붙여 한국적 진보 특유의 내향적 민족주의 정서나 일부 국수주의 현상에도 보수가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른바 IMF 체제의 ‘조기 졸업’을 자부하는 우리 사회에는 지난 여름 이후 월드컵 4강을 마치 ‘국력 4강’으로 착각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특히 대선을 전후해 한미동맹이나 남북관계에 연관된 사회적 금기가 크게 무너졌다. 물론 보수적 사대주의의 폐해는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한반도의 안보환경과 국가경제의 국제적 입지를 생각하는 것이 사대주의의 연장으로 낙인찍힐까봐 걱정하는 것은 열린 보수의 당당한 처신이 아니다.

▼진보와의 경쟁적 공존 필요▼

대선 실패가 곧 보수 붕괴는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새로운 정부와 진보개혁 시대에 대해 보수진영이 침묵과 냉소로 대응하는 태도인 바, 실상 이는 스스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와 진보의 적대적 대결이 아니라 경쟁적 공존이다. 진보에 비해 보수의 공(功)은 원래 화려하지 않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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