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차지완/서민 울리는 ´충청권 집값´

  • 입력 2002년 12월 29일 18시 30분


“집값이 실제보다 절반만 올랐다고 쓰면 안 되나요?”

기자는 얼마 전 충청권 부동산 시장 르포(본보 24일자 B1면 보도)를 취재하면서 뜻밖의 요청을 많이 받았다. 집값이 급등하면 집을 구할 수 없으니 조금만 올랐다고 써달라는 현지 주민들의 주문이었다. ‘보고 들은’ 대로 기사를 쓰면 투자 열기가 더욱 뜨거워질 것이라며 걱정하는 이도 많았다.

대통령선거가 끝난 뒤 충청권 부동산 시장은 노무현(盧武鉉) 당선자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들썩이고 있다. 행정수도 후보지로 꼽히는 몇몇 지역에서는 집 주인들이 아파트 값이 더 뛸 것이라는 기대감에 서둘러 매물을 거둬들였다.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의 분양권 프리미엄은 치솟았다. 대선 전 미분양으로 남아있던 아파트도 빠른 속도로 팔려나간다.

도대체 누가 사는 것일까.

현지 건설업체 관계자 및 부동산 공인중개사들은 “서울과 인천, 경기 지역의 투자자들이 부쩍 늘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부동산 중개업소 주변에서는 수도권에서 온 고급 승용차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이 아파트 분양권 30여개를 샀다는 소문까지 나도는 등 투기 조짐도 엿보였다.

반면 현지 실수요자에게는 노 당선자의 공약이 악재가 되고 있다. 부동산 중개업소 몇 곳만 둘러봐도 수도권의 투자자금이 올려놓은 아파트 값에 부담을 느끼고 시내 외곽으로 밀려나는 사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현지 실수요자가 ‘투기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대전 서구 만년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서 만난 40대 초반 부부는 이렇게 하소연했다. “우리는 대선 때 노 후보를 지지했거든요. 서민을 위한 정책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런데 이렇게 아파트 값이 뛰면 우리 같은 서민은 어떻게 집을 구하란 말입니까.”

부동산 투자자금은 ‘개발 호재’를 등에 업고 ‘틈새’로 몰리기 마련이다. 지금 충청권은 투기세력의 1차 공략 대상이 됐다. 대통령당선자가 호재를 제공한 데다 별다른 투기억제대책도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노 당선자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내 집 마련의 꿈을 가진 서민층을 짓누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차지완기자 경제부 marud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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