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열린마음 열린세상]"오르다 힘들면 쉬어 가야지요"

  • 입력 2002년 12월 25일 19시 34분


은메달을 따고도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는 건 한국 선수밖에 없다. 외국 선수는 ‘감격’해서 운다. 따지고 보면 금이나 은이나 그 분야 최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선수나 국민이나 오직 ‘금메달’뿐이다. 그것도 올림픽에서 따야지 아시아경기이면 벌써 시큰둥하다.

우리는 모두들 ‘일등 집착증’에 빠져 있다. ‘사회정신건강연구소’에서 최근 세계 일등에 대해 조사하면서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무엇보다 지난 올림픽을 기점으로 목표가 아시아에서 세계 일류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아시아 제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고 이젠 세계라는 것이다. 희망사항이었던 그 꿈이 월드컵을 계기로 확신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다. 그리고 실제 조사에서 세계 일등이 적지 않았다. 반도체 자동차 휴대전화 고속 인터넷 등 세계 정상을 줄줄이 정복해 가고 있다. 불행히 그 중엔 술, 청소년 흡연 등 나쁜 것도 적지 않다.

어쨌거나 이제 우리의 목표는 세계 정상이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세계 강호들을 상대해야 하는 힘든 등정이다. 우린 이미 무역 물동량만으로는 10위권에 진입했다. 이젠 질(質)이다. 그리고 경기 규칙도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위 ‘시장 원리’에 따르는 기본부터 몸에 익혀야 한다. 이건 어떤 정치논리로도 왜곡되어선 안 될 철칙인 것이다. 이런 기본마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는 한국적 풍토에서 이만큼 이루었다는 건 가히 기적에 가깝다.

하지만 ‘시장 원리’란 참으로 무서운 괴물이다. 이건 ‘약육강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는 무한 경쟁을 의미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사이엔 큰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도 이미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수억, 수십억원대의 연봉자가 있는가 하면 기본급도 못 받는 계층이 있다. 이게 시장 원리의 함정이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새로운 갈등 구조다. 한국 국민의 전통적인 평등의식으로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것이 세계 시장의 경쟁 원리라면 냉철한 이성으로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정서적으로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선현들이 가르친 ‘지족(知足) 의식’을 일깨워야 할 때다. 자기 실력대로 분수를 지켜 살아가는 슬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잘 살기 위해’ 마냥 위만 보고 달려왔다. 지난 40년 동안 국민총생산(GNP)이 400배로 뛴 나라는 이 지구상에 유례가 없다. 이런 고공 비행에서 지난 번 경제 위기는 국민을 ‘충격’이라기보다 ‘공황’ 상태로 몰아 넣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우린 강했다.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리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돌이켜보면 지난 경제 위기는 우리에겐 참으로 소중한 교훈이었다. 목표 고지를 향해 우린 너무 서둘렀다. 그러면서 무리도 빚고 억지도 부렸다. 기초가 부실했으니 무너질 수밖에. 하지만 그만하기 다행이다. 더 높이 올랐다 무너졌다면 남미(南美) 국가들처럼 아주 회복 불능 상태로 주저앉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응급 처방으로 그나마 긴급 사태는 면한 것 같다. 이젠 정말이지 찬찬히 정도를 따라 하자. 다시는 무너지지 않게. 그리고 이젠 무엇이 잘 사는 건지도 생각해 보면서 살자.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얼마나 많아야 하는 건지도 생각해 보자. 얼마나 더 가져야 행복할 것인지, 그 끝은 어디인지도 생각해보자.

지금 가진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할 수는 정녕 없는 것일까. 모자람을 아는 슬기가 우리에게 모자라지 않는지도 한 번 물어보자! 어디 물적(物的)인 것만이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건강한 다리로 움직인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때로는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기도 하자. 욕심만큼 못 오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큼 올라 온 게 대견하지 않으냐. 야위고 허기진 몸으로! 굽이굽이 힘든 일도 많았다. 돌아보면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 아, 그러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도 없진 않으리라.

그래, 잠시 쉬어가자. 작은 여유를 갖자. 발아래 경치도 내려다보고 앙증맞게 핀 꽃, 졸졸 흐르는 개울물, 새들의 지저귐도 들어보자.

서두르기만 하는 사람은 이 작은 행복을 느낄 수가 없는 법이다. 이번 연말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어보길 권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홀로, 산골 움막에서도 넉넉하고 풍요롭게 사는 슬기를 배워보자. 정상에 선 서구 선진국들은 벌써 ‘풍요의 독감’에 걸려 기침을 콜록거리고 있다. 성장의 한계를 진지하게 논하게 된 지도 한참 되었다.

그래도 우린 정상을 향해 올라가야겠지. 단 차분히, 정도를 따라 오르자.

이시형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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