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 내셔널 어젠다위 제안]윤영관/행복을 얘기하자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8시 54분


동아 내셔널 어젠다위원회가 9일 본사 8층 사무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3개 분과별 간사단 회의를 갖고 국가과제 선정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전영한기자
동아 내셔널 어젠다위원회가 9일 본사 8층 사무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3개 분과별 간사단 회의를 갖고 국가과제 선정작업을 마무리하고 있다. -전영한기자
우리는 행복한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좁고 자원도 부족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선진국의 문턱에까지 이르렀지만 우리는 정말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밥 먹듯 돌아오는 야근, 학교 이외에도 서너 개의 학원을 다녀야 하는 아이들, 짜증스러운 부정부패 뉴스들, 먹고 살 만하게 되었는데도 밀려오는 공허감…, 이런 것들 속에서 여전히 행복을 찾아 헤맨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들 한다. 먼저 개인이 최대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놓아두자는 견해가 있다. 그렇게만 하면 개인은 능력껏 일하고 일한 만큼 누리게 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민간부문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보호해 줘야 한다고 미국형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선 사회 구성원들이 강한 연대감을 갖고 함께하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라고 주장한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사회적 강자나 약자,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도록정의가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적극적으로 주어진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보장은 그 방편이라고 유럽형 복지국가론자들은 말한다.

이 두 가지 사고(思考)는 과연 대립적인 것일까? 잘살면서도 더불어 사는 공정한 사회는 양립하기 힘든 것일까? 20세기 후반의 인식의 틀은 대체로 이 두 견해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지만 결코 대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20세기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 양자를 아우를 수 있는 21세기적 모델을 한국적 맥락에서 모색해야 한다.

개인과 기업, 더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구나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나라를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한국처럼 국가주도형 경제발전을 추진해 온 나라일수록 이는 더 절실한 과제다. 기업만 하더라도 불필요한 규제들이 지금도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러한 규제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개방경쟁 체제에서 부(富)의 창출은 힘들다.

반면 우리는 하나의 국가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아무리 개방화 시대라고 해도 뿌리 없는 사해동포주의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열심히 일해서 국제경쟁에서 이기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고 싶어도 사회의 통합이 깨져나가 분열과 반목이 계속되면 이를 이룰 수가 없다. 농업개방을 둘러싸고 우리가 경험했던 혼란은 좋은 예다.

따라서 어떤 사회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장치를 갖춘, 함께하는 사회, 합리적인 게임의 규칙이 집행되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원하는 경쟁력 강화, 효율성, 부의 축적도 가능해진다.

한국사회에서도 ‘효율성과 사회적 연대의 조화’라는 실험이 시작된 지는 오래다. 8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우리는 전태일(全泰壹)과 같은 노동자를 분신으로 몰고 갔던 성장신화 속에 살았지만 21세기 초입에 이른 오늘 누군가는 한국을 ‘노조 공화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우리는 행복에 관한 이 두 가지 사고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독특한 환경 속에서 이 둘을 우리 나름대로 조화시키는 실험이 성공을 거둘 때 우리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금 우리는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갈등의 골이 더 깊어졌음을 느낀다. 이러한 갈등의 골을 메우고 사회적 통합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효율성’과 ‘사회적 연대’에 기초한 21세기 한국의 ‘행복 모델’을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그동안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보더라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어떤 이념도 정책도, 그리고 개혁도 인간의 행복에 우선하지는 못한다. 동아 내셔널 어젠다위원회가 새 대통령,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25개의 국가적 과제를 던지면서 ‘행복’을 키워드로 삼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이제는 행복을 얘기할 때다.

윤영관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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