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현모양처가 어때서

  • 동아일보
  • 입력 2002년 12월 6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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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부인이 되면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최근 대통령후보 부인들을 인터뷰하면서 공통적으로 던진 질문이다. 유력 후보 부인인 한인옥 권양숙씨의 서면답변은 모범답안처럼 똑같았다.
“대통령을 조용하게 내조하면서 친인척과 가족 단속을 철저히 하고 여성 어린이 노인문제와 소외계층을 보살피는 일에 관심을 쏟겠습니다.”
직접 만나 ‘다른 각도’로 물었을 때의 대답은 서면답변과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견해는 일치했다. 나라 돌아가는 것에 대한 자신과 주위 사람들의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겠다고 명확히 밝힌 것이다.
▼대통령 부인 역할론의 함정▼
두 가지 다 그른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친인척과 가족 단속을 다짐한 건 YS DJ 아들들의 구속과 처족에 얽힌 불상사를 감안했음이 틀림없다.
조용한 내조와 소외계층 살피기 역시 대통령 부인이든 내 마누라든 여자가 설치는 건 도저히 못 봐주면서, 여전히 고 육영수 여사를 역대 대통령부인 인기 1위로 여기는 국민정서를 고려한 게 분명하다. 자신과 주변의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하겠다는 것도 청와대 내 야당 역할을 해왔다는 육 여사를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엔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친인척 단속, 여성과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 그리고 여론 전달은 ‘조용한 내조’와 결코 양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친인척을 챙기겠다는 말을 곰곰 따져보면 이미 성인이고 사회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겠다는 뜻이 된다. 여성 및 소외계층에 관심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육 여사가 국모 같은 이미지로 봉사했던 양지회 활동은 여성 관련 정부조직도 없고 사회단체 역시 많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부 복지부가 있고 시민운동이 활발한 마당에 대통령 부인이 꼭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두 사람 다 “사조직 만들 생각은 없다”고 강조했으나 역대 정권에서 이런저런 연줄로 대통령 부인과 접촉이 잦았던 이들의 깜짝인사를 떠올려보면 개인적으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도 안심하기 어렵다.
자신과 주변의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하는 일이야말로 위험한 발상이다. 육 여사가 야당 역할을 한 시대는 언론이 재갈 물리고 야당이 제구실을 못했던 암흑기였다. 아무리 베갯머리 송사라는 게 있다지만 대통령 부인이 비서실 등 공식 라인을 제쳐놓고 어떤 사람의 무슨 얘기를 전달할지 모골이 송연해진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결혼 후 사회활동 경험 없이 가정주부라는 직업에 전념해 왔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대통령 비공식 제1참모인 대통령 부인의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 공식화하고 21세기에 걸맞게 확대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스스로 현모양처 역할이 좋아서 그 길을 선택했던 50, 60대의 두 주부가 남편 잘 만나 대통령 부인이 됐다는 이유로 여태껏 안 했던 ‘활동’을 꼭 해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미국의 몇몇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 못지않은 활약을 해왔고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 부인 로라 여사도 어린이 읽기 교육에 힘을 쏟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라 여사는 결혼 전 교사와 사서로 일했던 전문직 여성이다. 즉 그들은 대통령 부인이 되기 전부터의 자기영역을 확장한 것이지 억지 역할을 급조한 게 아니었다.
▼차라리 아무 일도 마시길▼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 헌법과 법률에는 대통령 부인의 역할이나 책임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다. 거칠게 풀이하면 의전 외에는 아무 일도 안 해도 괜찮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대통령 부인이 꼭 뭔가 해야 한다고 믿는 것도 건강한 현상이라 할 수 없다.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그들에게는 되레 무리한 요구다. 그런 강박관념이 청와대 권력을 이용하려는 세력에 휘둘릴 때, 우리가 뽑지 않고 아무도 임명하지 않았던 대통령 부인을 추문의 나락으로 떨굴 우려가 있다.
가정주부라는 직업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한 요즘이다. 대통령 부인이 본래의 모습에 충실한다고 해서 여성 발전을 후퇴시킨다고 시비를 건다면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다. 한인옥 권양숙씨 중 한 사람이 청와대 안방에 들어간 뒤에도 지금까지처럼 현모양처로 지내면서 국정에 아무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것이 나라 발전을 돕는 길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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