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 영/法농락 국정난맥 사실인가

  • 입력 2002년 12월 2일 18시 16분


추한 부패정치의 실상이 또다시 드러났다. 한나라당이 두번째로 폭로한 국정원의 불법도청 내용은 너무나 충격적이다. 불법도청의 사실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실명으로 등장하는 전 특별검사를 비롯해 기자들까지 통화내용을 시인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폭로내용이 전혀 날조된 허구만은 아닌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폭로내용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군의 장성인사를 비롯한 주요 기관의 인사는 물론이고 게이트의 특검수사에 이르기까지 청와대와 여권의 실세 정치인들이 개입했다는 내용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국정이 법과 제도가 아닌 청와대와 일부 여권 실세들에 의해 이렇게까지 농락당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를 곤혹스럽고 분노하게 만든다. 그동안 국민을 실망시키고 괴롭혀온 국정 난맥상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뒤늦게나마 확인시켜준 것으로 자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폭로된 도청내용 충격적▼

이것은 결코 그대로 넘길 수 없는 국기를 흔드는 중대한 일이다. 대통령 측근에 있는 정치실세가 그처럼 모든 일에 개입하고 부정한 해결사 노릇을 해 왔다면 그 책임은 우선 대통령이 져야 한다. 대통령이 특정인을 신임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신임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배경이 되었다면 대통령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적절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비판받아 온 권력부패와 정실 편중인사에 대통령 자신이 무관하다고 해도 그것이 몇몇 측근 인사들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이제는 단호히 측근정치의 나쁜 습성을 던져버려야 한다. 그래서 남은 두 달만이라도 법과 제도의 정치로 돌아가야 한다.

도청기록에 등장하는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들도 모든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버티려 해서는 안 된다. 이번 도청기록이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의혹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신들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했던 사실을 되새기면서 반성과 자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정당과 대통령후보들도 이번 일을 한낱 선거전략 차원에서만 다룰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폭로된 도청기록은 표를 얻거나 잃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정쟁의 대상으로 삼을 일은 더더욱 아니다. 청와대의 통화까지 감청하는 음흉한 공작 정보정치가 있어 왔다면 그것은 모든 정당이 힘을 합해 철저히 밝혀내고 책임을 추궁해야 할 일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불법도청 의혹은 모든 정당과 후보자가 앞으로 집권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이 아닌 법과 제도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굳히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도청기록에 나타난 권력의 부패한 단면과 그 남용은 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단연코 척결돼야 할 대상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후보나 새 정치를 강조하는 후보나 모두 이런 현상을 척결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하지 않고는 그들의 구호가 국민에게는 한낱 허황된 정치적 수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분노하고 있는 국민의 마음을 다독이고 다음 정권에서는 확실히 달라질 것이라는 강한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선거 운동이고 득표 전략이다.

▼검찰 엄정수사로 의혹규명을▼

검찰도 이번에는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불법도청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일은 수사 기술상 어렵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그런데도 선거를 의식해서 수사에 소극적이거나 수사를 지연시키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검찰 스스로 정치의 시녀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검찰이 정치의 시녀임을 자인하는 상황에서는 다음 대통령을 뽑아 본들 이 나라의 앞날에 희망은 없다.

검찰은 선거일 전까지는 적어도 도청의 사실 여부만이라도 밝혀내 국민이 진상을 알고 투표장에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의혹에 묻힌 상태에서는 주권자인 국민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라의 5년 운명이 결정된다는 엄숙한 현실을 직시하고 검찰이 이번만은 전과는 다른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허 영 명지대 초빙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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