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인철/이해 못할 '가계대출억제'

  • 입력 2002년 11월 24일 18시 59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미국의 중앙은행이다. 미 중앙은행 총재인 앨런 그린스펀은 지금 76세의 고령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일 것이다. 그는 1987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 세계 최고의 권위와 경륜을 갖고 미 경제를 이끌어왔다.

지난해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은 줄곧 국제테러 위협에 시달려 왔다. 지금은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에 기업투자와 민간소비 지출이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의회청문회나 민간외교협회 등에 나가서 1∼2%대의 초저금리 경기부양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만일 이 같은 초저금리도 효과가 없으면 통화당국은 국채나 다른 증권을 매입하는 형식으로 시중에 자금을 풀겠다고 했다. 이런 소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脫IMF' 민간소비 증가 덕분▼

미 증시상황은 우리나라 주식시장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주어 미 경제가 호전되어야 우리의 수출전망도 좋아진다. 그래서 미국 경기회복 여부에 우리는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국내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외환이 자유화되어 있어 국내 금리정책은 미국 금리정책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최근 언론보도에 의하면 올해 3·4분기(7∼9월) 국내총생산(GDP)성장률은 5.8%이며 이것은 한국은행이 7월에 발표한 공식 전망치 6.7%에 크게 못 미친다고 한다. 가장 큰 원인은 이미 예상된 일이기는 하지만 건설경기의 급랭과 민간소비의 하향 추이 때문이다. 전년동기 대비 민간 소비증가율은 지난 1·4분기에는 8.4%였으나 2·4분기에는 7.6%로, 3·4분기에는 다시 6.1%로 떨어졌다. 이런 추이는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정책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의 입김도 잘 안 먹히는 그린스펀과 같은 중앙은행 총재가 없다. 사정이 이런 이유는 역대 중앙은행 총재는 물론이고 경제장관들도 자신의 실력이나 경륜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부분 ‘팀워크’라는 미명 하에 학연이나 지연 등 연고주의에 의해 지명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귀결로 국민과 언론은 처음부터 정부의 금융통화정책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경제상황이 조금만 예상보다 달라져도 총재나 경제장관은 언론의 지탄을 받고 경질되기 일쑤다.

97년 외환위기도 결국 잘못된 인사정책 때문에 생긴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지극히 중요한 경제정책 결정자 자리에 비전문가 출신 관료들을 적당히 돌려가며 배치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스럽게도 최근 우리 경제는 그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는 최근 한국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느냐고 감탄하면서, 이제 일본이 아니라 한국을 배우자고 소리내고 있다. 이같이 우리 경제가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투자가 여전히 부진할 때 다행히 환율이 높아 반도체와 통신기기 등의 수출이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해 주었고, 저금리 가계대출을 장려해 주택경기를 일으킨 덕분에 민간소비가 진작됐기 때문이다.

▼또 앉아서 위기 자초할건가▼

그런데 이제 와서 가계대출이 많으면 상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으니 벌칙성 고금리를 부과하고 환수까지 하겠다고 한다. 금융위기를 자초하는 이 같은 발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미국과 일본의 무위험 자산수익률은 제로에 가까운 수준이다. 이들 국가로부터 싼 자금이 국내에 들어올 텐데, 예금금리는 내리고 대출금리는 올려 받겠다는 정부정책은 이해하기 힘들다.

내년 경제는 경제예측기관이 내놓은 대로 반드시 4∼5% 저성장 수준으로 가라는 법은 없다. 과거 경제불확실성은 언제나 있어 왔고 전쟁 가능성도 언제나 있어 왔다. 이제 곧 출범하는 새 정부가 성장잠재력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풍부한 고학력 노동력과 여성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도록 적정 성장정책을 취한다면 의외로 크게 좋아질 수도 있다.

김인철 성균관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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