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눈]안경환/사형제를 사형시켜라

  • 입력 2002년 9월 22일 18시 24분


법관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판할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의 일을 판단하는 제도를 가진 이상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릇된 판단을 막기 위해 최대한으로 신중한 과정과 절차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것이 헌법이 요구하는 바다. 여러 차례 재판하는 심급제도를 만들고 당사자에게 유리한 증거가 충분히 제출될 수 있도록 상세한 법 원칙을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1975년 ‘인혁당 사건’의 재판이 오류라는 공식의견을 발표했다. 일찍부터 국내 종교단체에 의해서는 ‘사법살인’으로, 국제인권단체에 의해서는 ‘인권법의 모독’으로 낙인찍혀 있던 재판이고 보면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민간인 신분으로 1, 2심에서 군사재판을 받았고 지극히 졸속으로 진행된 대법원의 상고기각에 이어 불과 20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 여덟 명의 생명을 되살릴 수는 없다.

‘판사는 판결로만 말한다.’ 법관의 직무수칙 1호다. “기록을 토대로 법관의 양심과 소신대로 유죄를 선고했다.” 당시 사건에 관여했던 판사들에게 더 이상의 사적 회고를 강요할 수도 없다. ‘회한과 오욕의 세월’이었노라고 압축한 그 시대 한 사법부 수장의 퇴임사 속에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헌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최고의 이념으로 삼는다. 그 아래 포섭된 수많은 권리 중 생명권이 가장 귀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사형의 선고는 지극히 신중한 숙고 끝에 내려져야만 한다.

번연히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묵과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인해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는 살인의 공범이 된다는 법 이론도 있다. 독일 형법에 규정된 ‘법 왜곡죄’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행한 시대의 이월 부채를 갚는 일은 후세인 모두의 몫이다. 덮여 있던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의 인격과 명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재심 사유에 해당할 것이다. 국가기관이 공표한 의견을 바탕으로 원래의 재판에서 범한 중대한 사실의 오인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차원의 신원과 명예회복보다도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료인 법관에게 모든 권한을 주고 책임을 부과하는 우리의 사법제도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를 곰곰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법제도는 주권자인 국민을 객체로만 규정할 뿐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인정하지 않는다. 배심제도도 참심제도도 전혀 없다. 법률의 적용은 물론 사실의 판단도 판사가 전적으로 책임진다.

또한 판결에 대한 헌법소원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실로 판사의 전지전능함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아래서는 오판의 가능성과 정치재판의 위험이 높기 마련이다. 많은 나라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단순한 사법의 수혜자에 그치지 않고 직접 사법제도의 운영을 주도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한 사람의 관료보다 열두 명의 보통사람의 중지에 따라 유죄, 무죄를 판단하는 배심제도나 재판부의 구성에 사법관료와 함께 양식을 갖춘 사회 원로를 참여시키는 참심제도는 재판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내리는 민주적 의식이 되도록 돕는다. 이렇듯 ‘민주적’ 사법제도의 도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사형제도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도 이루어져야 한다. 어느 나라에서나 민주사회로 이행하면서 사형제도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진다. 이른바 지구상의 ‘문명국가’ 치고 아직도 사형제도를 존속시키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더구나 파렴치범이 아닌 사상범에 대해서 사형을 부과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사상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다른 사상을 관용하는 헌법원리야말로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우수한 이데올로기라는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인권대통령’을 표방한 김대중 대통령의 5년 통치기간에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실정에도 불구하고 실로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또한 이미 과반수의 국회의원이 사형폐지를 위한 법안의 발의에 서명했다.

이제 마무리 작업만 남아 있다. 언제나 역사의 발전은 불행한 과거를 딛고 이루어지는 법이다.

안경환 서울대 법대 학장·한국헌법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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