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논설위원칼럼]배종대/청계산 '입맞춤 길'

  • 입력 2002년 8월 1일 18시 39분


8·8 국회의원 재·보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전국 13개 지역구에서 임기가 절반이 지난 국회의원을 새로 뽑는 일인데도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사활을 걸고 있다. 대선(大選) 전초전이라는 시각 때문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이번 재·보선에서도 밀리면 대선은 끝장이라고 보고 한나라당은 압승의 여세를 이어가면 12월 ‘대권(大權)’은 ‘표정관리’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민주당은 정당을 깨는 것부터 대선후보 교체에 이르기까지 어떤 수단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니 그 결연함은 비장하다. 국민이야 어떤 눈으로 보건 그 ‘진흙탕싸움’은 넥타이만 맸을 뿐 시장바닥에서 머리채를 끄잡는 아낙의 싸움과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을 보고 기분 좋은 국민은 없다.

▼시민 배려한 자상함▼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이라고 하였던가. 조금 과장된 표현이 될지는 모르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전 국민이 미래의 대통령 한 사람을 향해서 줄서기를 하는 형국이다. 비록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 꿈을 함께 좇는 사람은 국민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큰 꿈’을 좇는다. ‘대박’을 겨냥하여 ‘아파트’에 몰려다니는 아줌마들이나 복권열풍도 예외는 아니다. 일거에 모든 것을 바꿔버리겠다는 생각이니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큰 일’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은 소인배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청계산에 가면 ‘개나리골 삼림욕장’이 있다. 이곳은 입산료를 받는 국립공원이 아닌데도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관리가 정성스럽기 이를 데 없어서 찾는 사람이 주인대접 받는 것을 실감케 한다. 곳곳에 쉼터와 의자가 구비되어 있는가 하면 ‘황토맨발 등산길’ ‘사색의 길’ ‘입맞춤 길’ ‘산적 길’ ‘임꺽정 길’ 등 멋스러운 이름이 팻말에 새겨 있다. 이 공원을 관리하는 구청직원은 분명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가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실천한 진정한 공복(公僕)이다. 우리가 ‘큰 일’을 한다는 정치인한테서 이런 느낌을 가져본 적은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대부분의 문제는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 둑은 결코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DJ가 자식문제로 자신의 정치인생 말년에 치명상을 입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사소한 주의를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제가(齊家)가 치국(治國)에 앞선다는 상식을, YS의 전철을 뻔히 보았음에도 실천하지 못한 ‘경솔한 과실’이 정치적 비수가 되었다.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빌라’ ‘며느리’ ‘아들’ 문제 등도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마늘문제’가 그렇고, 총리인준 청문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수출품에 클레임이 걸리는 것도 엄청난 하자보다는 사소한 뒷마무리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우리는 외형상의 민주주의는 성취하였다. 언론의 자유는 세상이 너무 시끄러워서 ‘박정희’가 그리울 정도이다. 이제는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나를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가지지 않아도 되고 쿠데타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대권’을 잡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맡은 바 ‘작은 일’에 정성을 다 바치는 민주시민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시민’들이 이 땅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서민이 주인되는 세상됐으면▼

정치인의 거창한 구호가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곤혹스럽게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길거리의 가래침’이다. 그래도 우리는 월드컵을 그대로 넘겼다. 비 오는 날 보도블록은 조심해서 밟아야 한다. 번잡한 전차 안에서 아무리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대학생이 교수보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폴짝 뛰어 타고도 아무 감정이 없다. 서울 시내의 도로포장은 항상 덧씌우기만 있어서 보도(步道)보다 높은 도로도 얼마든지 있다. 여기에서 육교가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그래도 ‘엿가락 도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이다. 아파트 계단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 이런 것들은 선진국이 되기 위해 시민이 해결해야 할 몫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크고 작은 골목에서 ‘청계산 입맞춤 길’을 연상할 수 있는 날이 와야 한다. 그러면 8·8 재·보선 후보나 대선후보는 국민을 무시하는 언행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주인대접’은 우리가 할 탓이다.

배종대 고려대 법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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