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2002 대선후보 검증 3]대쪽과 인권

  • 입력 2002년 5월 15일 18시 52분


1988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오른쪽)이 법원 수뇌부를 청와대로 초청. 왼쪽이 이회창 대법관.
1988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오른쪽)이 법원 수뇌부를 청와대로 초청. 왼쪽이 이회창 대법관.
《동아일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가 확정됨에 따라 양당 후보에 대한 검증 기획보도를 준비했다. 첫 번째로 ‘공인 이회창과 노무현’을 추적해 봤다. 두 후보는 시기와 기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판사 변호사 각료 정치인의 길을 걸어왔다. 동아일보는 유력 대선후보의 자질과 능력, 공약과 정책에 대한 검증작업을 12월 19일 대선 때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물론 최대한 객관성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대통령후보는 대법원판사 시절인 83년 3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대법원 상고심에 참여한다. 82년 3월 발생한 이 사건은 80년대 반미(反美)시위의 기폭제가 된다.

당시 재판관은 이일규(李一珪·재판장) 이성렬(李成烈) 전상석(全尙錫) 이회창 대법원판사 등 4명. 방화 부분은 피고인들도 인정했지만, 문제는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였다. 결론은 보안법 7조1항 위반 부분도 원심대로 유죄였다.

▼글 싣는 순서▼

- ② 변호사 시절
- ①무명 시절

판결문엔 ‘반국가단체에 이롭다는 미필적(未畢的) 인식이 있으면 된다’고 명시돼 있다. 즉 북한을 이롭게 하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어도 그럴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범죄가 성립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상고심 때 이회창 대법원판사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본인은 “재판장도 주심판사도 아니어서 판결문 작성에 관여하지 않았다”고만 밝히고 있다.

이일규 변호사는 연락이 되지 않았고, 전상석 변호사는 작고했다. 다만 이성렬 변호사는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20년이 지난 사건을 이제 와서 뭐 하러 언급하느냐”고 말했다. 당시 변론을 맡았던 이돈명(李敦明) 변호사는 “이 후보도 결국 판결에 동의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나 9년 뒤인 92년 3월 이회창 대법관은 83년 판결과는 다른 ‘국가보안법 소수의견’을 내놓는다. 현대정공의 한 노조원이 ‘임금인상 투쟁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키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내용의 ‘임금의 기초이론’이란 책을 갖고 있다 구속기소됐는데, 이 책의 소지행위가 보안법에 저촉되느냐가 재판의 쟁점이었다.

이회창 대법관은 ‘미필적 인식만 있으면 된다’는 다수의견에 대해 “금기된 표현물이 지닌 상징적 위험성만으로 불법행위로 단정해선 안된다. 고무찬양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적행위가 나타나야 적용할 수 있다”고 반론을 폈다.

함께 소수의견을 낸 배만운(裵滿雲) 전 대법관은 “당시 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이 후보는 외국 사례들을 연구해 소수의견을 주도했다”고 기억했다.

이 후보가 꼽는 ‘인상적’인 소수의견은 ‘박세경(朴世俓) 변호사 계엄법 위반사건(85년 5월)’과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김철기(金喆基) 총무 국가모독죄 사건(83년 6월)’에 대한 것 등 두 건이다.

소수의견은 재판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나중에 재판이나 입법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실제로 박정희(朴正熙) 정권의 잔재였던 국가모독죄에 관한 그의 소수의견은 88년 12월 조문 자체가 없어지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후보의 소수의견에 대해서도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소신”이라는 평가와 “실효성 없는 과시”라는 상반된 시각이 맞서고 있다.

정치 입문 이후 이 후보의 보안법에 대한 견해는 과거에 비해 다소 혼란스럽다. 이 후보는 재작년 7월 “보안법은 제정 및 오·남용의 경위야 어찌됐든 부정적 측면을 제거하고 완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당 소속 의원 연찬회)고 했다가, 대선을 앞둔 요즘엔 “법을 바꿀 필요가 없다”(5월9일 기자회견)고 정리했다.

이 후보는 대법관이 되기 직전인 88년 1월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당선자가 출범시킨 민주화합추진위원회(민화위)에 참여한다. 당시 민화위를 ‘80년 광주문제를 덮으려는 어용기구’로 보는 시각도 있어서 이 후보는 한때 참여를 주저했다는 후문.

민화위원이었던 현홍주(玄鴻柱) 전 주미대사는 “이회창 변호사는 ‘정치적 기구에 간여하고 싶지 않다’며 고사했으나 ‘그런 분이 꼭 참여해 주셔야 한다’며 어렵게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고 전했다.

민주발전분과위에 소속된 이 후보는 “(박종철씨) 고문사건을 잘 처리하지 않으면 광주사태 못지않은 신정부의 족쇄가 될 수 있다”(4차 전체회의)고 말하는 등 기본권 보장과 사법권 독립 등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특히 그는 분과위 정부조직 개선안 토의시 ‘문민통치의 확고한 원칙’이란 구절을 넣자고 주장하기도 했다(9차 분과위회의). 국회에 출석한 장관이 반론을 위해 국회의원과 같은 ‘반격권’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눈길을 끌었다(분과위 10차 회의).

이 무렵 법조계는 또다시 격랑에 휩싸인다. 사법부 독립을 외치는 현직판사들의 서명운동으로 번진 제2차 사법파동의 물결이었다. 88년 4·26총선 후 조성된 여소야대 정국에서 정기승(鄭起勝)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고, 이일규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했다. 이 후보는 이런 와중에 그해 7월 대법관으로 돌아온다.

정연욱기자 jyw11@donga.com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

▼노무현 후보

‘사람 사는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덩실 해방의 거리로 달려가누나….’

4월28일 새벽 경기 이천시에서 열린 ‘노사모’ 회원들의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대통령후보 확정 축하모임에서 노 후보는 감회 어린 표정으로 ‘어머니’라는 노래를 불렀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시위 군중과 함께 불렀던 노래였다.

81년 부림(釜林)사건 변론 이후 노 변호사의 ‘의식화’는 급속히 진전됐다. 84년 부림사건 구속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해문제연구소가 노 후보의 변호사 사무실 한쪽에 차려졌다. 부산지역 재야단체의 효시였다.

그는 이 무렵 일주일에 두세 차례정도 젊은 재야인사들을 집으로 불러 밤새워 시국 토론을 했다. 10여개 회사의 법률고문직은 물론 모두 박탈당했다. 자연히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는 “변호사로서 잘 나가던 남편이 이상한 사람들에게 이끌려 잘못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들 건호(建昊)씨는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말다툼을 했다”고 기억했다.

노 변호사의 법정 변론도 더욱 ‘전투적으로’ 변해갔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반말로 신문하면 가차없이 “왜 반말을 하느냐”고 외쳤다. 84년 반미(反美) 자주화를 내건 삼민투 사건 변론 때는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국가보안법은 범죄구성요건이 명확하지 않아 죄형법정주의에 맞지 않고,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함으로써 헌법의 평화통일 정신에 어긋나며, 특히 이적표현물소지죄는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그의 지론은 이 시절 변론과정에서 형성된 셈이다. 88년 9월 울산사회운동협의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그는 마침내 “국가보안법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악법”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노 후보는 86년 9월경 자신이 맡고 있던 조세사건과 일반 민형사사건을 모두 후배 문재인(文在寅) 변호사에게 넘긴다. 그때부터 그는 노동자 학생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가 데모에 참여하는 일이 잦아졌다.

87년 6월항쟁 때는 부산 시위대를 지휘해 ‘현장사령관’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최루탄이 코앞에서 터져도 물러서지 않아 경찰관들 사이에선 ‘독종’으로 통하기도 했다. 노 후보 자신의 표현대로 그 즈음 그의 직업은 변호사가 아니라 ‘운동’이었다.

노 후보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세상이 공평치 못한 것은 돈 많은 사람과 권력을 쥔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빨아먹기 위해 한통속이 되어 법과 권력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나 혼자 하는 무료변론 몇 건 따위는 정말 계란으로 바위 치기란 생각이 들었다.”

문재인 변호사의 시각은 좀 다르다.

“나 같은 학생운동권 출신들은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은 뒤에는 나름의 체면과 한계 때문에 변론이나 재정적 지원을 하는 역할만 주로 했다. 그러나 노 변호사는 학생운동을 거치지 않은 까닭에 오히려 운동 초기의 강한 열정을 보여준 것 같다.”

이때 노 후보는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됐으나 ‘사회주의는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전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그는 “내가 사회주의에 결국 승복하지 못한 건 아마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에 마음이 좀 끌리다가도 권력구조에 부닥치면 ‘이건 아니다’로 돌아서곤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노 후보는 운동권 내에서도 늘 소수파였다.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노 후보와 함께 부산에서 87년 6월항쟁을 이끌었던 정윤재(鄭允在)씨의 평가.

“노 후보는 정통 운동권에 비하면 개량주의자에 가까웠다. 그의 사고 속에는 법률가라는 직업에서 연유하는 듯한 미국적 합리주의가 늘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는 분석의 도구일 뿐 대안이 아니다’고 말하곤 했다.”

노 후보와 오랫동안 인권변호사 활동을 같이 해 온 김광일(金光一·전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 변호사의 평가는 또 다르다. 김 변호사는 “균형적인 가치체계나 인성 형성이 안 돼 있는 것 같아 노 후보에게 혼자 일을 맡기면 항상 불안했다”고 말했다.

노 후보는 6월항쟁 이후 인권변호사에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그의 노동법률사무소는 87년 하반기에만 부산 경남 지역에서 300여개의 노조 설립을 지원해 그 시절 ‘노동자 대투쟁’의 밑거름이 됐다.

같은 해 9월 그는 대우조선 파업사태 때 분신한 이석규(李錫圭)씨의 장례식 처리 문제로 난생 처음 철창 신세(제3자 개입 혐의)를 진다. 그는 23일 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지만 변호사 업무정지를 당한다.

김정훈기자jnghn@donga.com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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