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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5월 6일 12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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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뉴스의 시작은 물론이거니와 광고내용, 사람들의 관심 모두 축구가 점령했다. 한마디로 세상이 ‘축구多’. 축구 팬으로서는 정말 꿈 같은 나날들이다. 입에서 ‘오래 살고 볼 일’ 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니 말이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으면, 곧 원상복귀 될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월드컵이 국가적 대사가 되다 보니 정부, 기업, 언론이 너나 할 것 없이 참여하게 된데다,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 사이클과 맞물려 지금과 같은 ‘땡축’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독할 정도로 국가대표 경기만 인기 있는 국내 축구풍토와 무엇이든지 빨리 뜨거워지고, 식는 한국인의 속성을 감안하면, 일편, 일리 있는 지적이기도 하다. 피파가 권장하는 프로리그 팀 수도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리그운영을 하고 있고, 각 지역 연고의식 또한 프로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한국축구 전반에 걸친 구조적인 문제까지 꺼내다 보면, 월드컵 효과일 뿐이라는 이들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좋은 예가 월드컵 경기장의 사후 활용방안 이다. 프로 팀이 없는 도시에서 내놓은 대책이라고는 고작 경견장, 대형 콘서트와 이벤트 개최, 대규모 상가 및 문화위락시설로의 탈바꿈이다. 아무리 치밀한 시장조사와 상권분석을 한다고 해도 프로 팀이 전용으로 쓰는 것보다 활용가치가 높을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지방자치단체 역시 프로구단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해 보았지만, 절차상의 흥정만 오갔을 뿐,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서 프로축구 팀은 큰 돈 들여서 해볼만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이다. ‘어떻게 든 되겠지’ 하며 엄청난 돈을 들여 지은 경기장들이 월드컵만을 위한 일회성 공간이 될 판이다. 월드컵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시민에게 돌아오는 것은 재정부담의 후유증 뿐이다.
열악한 아마축구 현장, 프로축구에 대한 대중의 철저한 외면 등, 하나부터 열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현재의 축구붐은 장사를 잘해서 생긴 이익이 아닌 반사이익에 가깝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풀리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필자는 감히, 한국축구가 축구강국 대열에 합류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단언한다.
어느 나라의 축구 수준을 평가하는 가장 큰 잣대는 국가대표팀의 실력 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국내에 일어나고 있는 축구붐의 지속 여부는 우리 대표팀의 16강 진출 여하에 달려 있다는 전망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월드컵 16강에 밥 먹듯 진출하는 나라는 아직 1승도 올리지 못한 나라와 달라도 분명히 다르다.
프로리그 규모에서부터 팬들의 축구지식 수준, 관전문화, 축구관련 산업 등등 축구가 사람들의 생활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과 ‘포지션’ 차이다. 기초가 튼튼한 건축물이 오래가고 그렇지 않으면 부실공사가 되듯, 1~2년간의 전폭적인 투자와 집중적인 관리, ‘하면 된다’ 식의 분위기 조성으로 축구강국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혹시라도 그렇게 되더라도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필자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본다.
그렇다면 왜 필자가 한국축구가 축구강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단언하느냐, 바로 사람들의 생활과 산업의 변화다. 한국축구를 20~30년 넘게 지켜본 전문가는 아니지만 매주 클럽축구를 하고 있고, 많은 시간 한국축구에 관심을 갖고 경험하고 있는 나름대로 한국 축구계 최후방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 필자는 지난해부터 깜짝 놀랄만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오전이면 30~40대 조기축구 아저씨들로 채워지던 운동장에 10대 후반, 20대 초반으로 구성된 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간혹 가다 볼 수 있는 ‘특이집단’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느 날부터 운동장 한 구석을 차지하며 매주 등장했다. 이들의 유니폼은 ‘각양각색’. 베컴의 이름과 등 번호가 마킹 되어있는 잉글랜드 대표팀 유니폼에서부터, 인터밀란, 맨체스터UTD, 이탈리아 대표팀 유니폼과 트레이닝 복까지 이름 있는 팀과 선수의 의류는 물론, 축구화, 장비까지 필자가 보기에 신기한 용품들이 운동장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이 또 다른 팀들을 초청하면 그야말로 사설월드컵이 벌어졌고, 식당용 대형 냄비에 육개장을 끓이며, 나눠먹는 것을 낙으로 삼던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황당’ 이라는 말 이외에는 생각나지 않게 된 것이다. 요새도 축구전문 업체들이 인터넷상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호기심에 구경하다 보면, 없는 것이 없고, 좋은 물건이다 싶으면 며칠 후, 여지없이 ‘재고없음’ 이라는 표시를 쉽게 볼 수 있다. 미미할 수도 있겠지만, 축구 팬들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작지만 산업이라는 것이 창출되었다는 점에서 필자는 희망을 가졌다. 무슨 희망이냐? 축구로는 뭘 해도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는 말이다.
두 번째, 팬들의 축구에 대한 지식 수준이다. 축구 자체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부족하고, 축구팬, 축구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언론의 보도에 공감하지 못한 축구팬, 네티즌들의 욕구불만은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전문가 의견의 인용보도, 상황설명 이외에는 선수와 연예인과의 관계, 두리뭉실 ‘어떻다고 하더라’ 식의 ‘산신령식’ 추측 보도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99년 6월에는 왜곡보도 자행하는 모 신문사와 모 기자는 각성하라는 플래카드가 경기장에 걸리기도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PC통신을 중심으로 축구 팬들이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서로의 의견을 전달하며, 축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열정을 읽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럽던 시절이었다. 서서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한 순간의 기분풀이 수준의 게시물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뜨거운 가슴과 축구, 선수, 문화 각 분야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역시 늘어났다. 이렇듯 팬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거의 소식지 수준이었던 스포츠 언론 또한 무엇보다도 축구에 대한 전문성 보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 과정을 한국축구는 거쳐왔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눈높이가 달라진 팬들이 오랜 시간동안 기초를 탄탄히 다진 후 새로운 지평을 만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설사, 한국축구가 이번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지 못하더라도 최근 일고있는 축구 붐, 한국축구문화는 쉽사리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필자는 한국축구의 자생력이 충분히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만큼 뿌리가 있고, 과정이 있었고, 진행중인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수십억 인구가 벌이는 축제가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들을 지켜보게 될 것이고, 수많은 나라에서 몰려드는 축구 팬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또 다른 축구문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이번 월드컵이 지금까지 긴 시간동안 홀로서기를 인내해왔던 한국축구가 도전장을 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보잘 것 없을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중반, 논바닥 잔디운동장에서 프로 개막전을 치렀던 한국축구가 이제는 멋진 경기장과 ‘내공’ 이 쌓인 축구 팬들을 보유했고, 축구관련 산업들도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볼륨이 상대적으로 적고, 진행중인 상황이라지만, 이정도면 월드컵 16강에 진출해도 결코 유럽, 남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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