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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5월 5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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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는 최근의 반미 논의에 대한 박선숙(朴仙淑) 대통령공보수석비서관의 분석이다. 1500만 접속건수를 기록했다는 ‘엽기 DJ’류의 반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엽기 DJ는 차기 전투기(FX)사업 기종으로 미국 보잉사의 F15K가 선정된 것과 관련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진한 전라도 사투리로 욕설을 퍼붓는 내용이다. 엽기 DJ를 만들었다는 ‘배칠수’라는 인터넷 디스크자키는 노래를 부르며 “퍼킹 유에스에이”를 외치기도 한다.
엽기 DJ는 욕설이 뒤섞인 이 같은 감정적 표현 방식으로 F15K 도입 결정 과정에서 국가적 자존심이 훼손됐다고 생각하는 인터넷 세대의 정서에 어필하며 급속도로 퍼졌다.
미국문화원을 점거했던 80년대의 대학생들처럼 반미를 논리로 설명하려 했다면 아마도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논리보다 감성이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요즘의 반미를 대중의 취향에 따라 뜨고 지는 ‘패션’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반미를 패션으로 보는 시각에는 최근의 반미가 한때의 유행에 불과하며, 별다른 현실적 영향은 없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특히 여권에서 그런 식의 사고가 많이 발견된다.
민주당 한화갑(韓和甲) 대표가 최근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다음과 같은 발언도 반미를 대하는 여권의 시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대학 한 클래스가 64명인데 그 중 60명이 노무현(盧武鉉)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다. 노 후보에 대한 학생들의 지지가 많은 이유를 보면 아주 재미있다. 첫째는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있는 사람들 것을 못사는 사람들에게 주자고 했다는 것….”
적어도 ‘60명 대학생들’ 사이에 부는 ‘노무현 바람’의 한쪽에는 분명 반미(미군 철수)가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인데 한 대표는 대학생들의 그런 경향을 ‘재미있다’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반미는 안 된다’는 공식 입장을 말하고 있는 여권의 이율배반이 발견된다.
지금의 반미가 영향력 없는 ‘한때의 패션’에 불과하다고 애써 무시하지만 내심으론 그것이 현실, 특히 정치에 미치는 파급 효과를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얘기다.
노 후보가 “볼일이 없으면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대미 자존심을 강조하는 것도 반미 패션의 현실 영향력을 의식한 것 아니냐고 하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패션 반미가 현실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은 논리적 반미보다 오히려 더 강력하다. 80년대의 반미는 그 치열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의 벽을 결코 넘지 못했다.
사정이 그런데도 그 반미를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반미의 현실적 영향력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세계 최강국 미국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는 국익, 나아가 민족의 생존과도 관련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정파적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상황을 적당히 얼버무릴 일이 아니다.
적어도 국가운영을 담당하는 주체라면 반미든, 친미(親美)든, 용미(用美)든 당당하게 자기의 주장을 밝혀야 한다.
윤승모 정치부 차장대우 ysm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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