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크 재선 확실…강한 카리스마 30년간 우파 이끌어

  • 입력 2002년 5월 5일 18시 45분


《하원의원(6선) 장관(4개 부처) 파리시장(18년) 총리(2회) 대통령(7년)…. 한 사람이 거쳤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출세가도를 달려온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69)에게 또 하나의 빛나는 경력이 보태지게 됐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재선 대통령이다. 강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연설력, 훤칠한 용모 등 대중 정치인이 갖춰야할 조건과 자질을 두루 갖춘 시라크는 샤를 드골에 이어 30년간 프랑스 우파의 지배자로 군림해왔다.》

이번 대선에는 행운까지 따랐다. 리오넬 조스팽 총리로 인해 대통령 자리를 위협받던 시라크는 누구도 예측 못한 ‘르펜 돌풍’에 조스팽이 나가 떨어지면서 사실상 ‘차려놓은 밥상’을 받게 됐다. 그러나 시라크의 오늘이 행운만으로 가능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그는 기나긴 정치역정에서 위기 때마다 특유의 정치감각과 정면돌파로 헤쳐나간 프랑스판 ‘정치 9단’이었다.

지난해 시라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파리시장 재직시 주택업자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진 데다 정치자금으로 호화판 가족여행을 즐긴 것까지 드러나 그의 대통령직 수행은 한때 ‘뇌사상태’에 빠지는 듯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검찰의 출두요구까지 받는 등 그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야당과 언론으로부터 사임 압력을 받으면서도 침묵을 지켰던 그는 혁명기념일인 7월14일 TV 기자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해명하면서 조스팽 내각의 실정을 질타, 맞불을 놓았다. 시라크의 대국민 호소 작전은 먹혀들었다. 지난해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주요 선진 8개국(G8) 정상회의 때 수십 만명의 시위대가 몰려 미국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등 참가국 정상들은 시위대를 강력히 비난했었다.

그러나 오직 시라크만이 “수십 만명이 모여서 시위를 벌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며 반 세계화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창했다. 시라크의 주장은 신경제와 세계화에 회의를 안고 있던 유럽 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조스팽 총리도 전세계 국가를 넘나드는 투기자본에 과세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토빈세’ 신설 주장으로 시라크의 뒤를 따랐다. 이를 두고 프랑스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 “역시 감각은 시라크”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 시라크지만 9·11 테러가 나자 누구보다 먼저 미국에 달려가 미국민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위로했다. 그의 발빠른 행보는 좌파 집권 이후 범죄율 증가로 치안위기를 걱정하는 프랑스 유권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뼈아픈 실수는 97년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RPR가 원내 1당이던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총선을 실시한 것. 그의 예상과 달리 조스팽이 이끄는 좌파의 사회당이 1당을 차지하면서 ‘동거(Cohabitation) 정부’가 탄생하게 됐다.

‘행정의 달인’ 조스팽의 좌파 내각과 동거하면서 시라크 대통령의 국정주도권은 급속히 위축됐었다. 장마리 르펜 역풍에 힘입은 바 크지만 압도적 지지율로 재선된 그가 명실상부한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거듭날지 주목된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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