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권노갑씨의 "기억이 잘 안 나"

  • 입력 2002년 3월 6일 18시 19분


민주당 권노갑(權魯甲) 전 최고위원은 어제 기자간담회에서 2000년 8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당시 김근태(金槿泰) 정동영(鄭東泳) 두 고문 외에 자금지원을 한 사람이 없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잘 안 난다. 안 준 것 같다”고 했다. 권씨는 기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줬다는 보도가 있다고 하자 “받았다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라. 내가 도와준 게 한두 사람이 아닌데 일일이 어떻게 기억하나”고 답했다. “돈으로 도와준 것은 두 사람이 전부”라던 권씨의 말이 하루 새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바뀐 것이다.

이는 그동안 잇단 ‘게이트’ 의혹에 연루된 현 정권 핵심 인사들의 ‘전형적 화법’이기도 하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연루 혐의에 대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했다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권씨는 이 정권의 ‘실질적 2인자’로 인식돼온 인사다. 그런 그까지 말 바꾸기의 행태를 보이는 것은 실로 ‘정권의 품격’에 관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도대체 한두 푼도 아니고 수백, 수천만원에 이르는 거액을 줬는지 말았는지가 기억이 잘 안 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도와준 게 한두 사람이 아닌데 일일이 어떻게 기억하느냐는 또 무슨 소리인가. 문제의 초점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도와줬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생긴 돈으로 도와줬느냐는 것이란 점을 권씨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권씨는 부인이 식당을 운영해 번 돈에 몇몇 친지가 도와준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그런 변명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어제 본란을 통해 권씨가 그의 위세에 걸맞은 품격으로 고백성사하기를 고언(苦言)했다. 그 기대마저 접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권씨 본인도 검찰 조사에 응하겠다고 한 만큼 검찰은 더 이상 수사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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