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비리보다 더 추한 거짓말

  • 입력 2002년 2월 17일 18시 50분


이른바 ‘4대 게이트’ 관련자들의 ‘거짓말 경연’을 보노라면 ‘게이트’로 불리는 권력형비리 사건의 원조격인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생각난다.

이 사건은 1972년 6월17일 워싱턴 워터게이트호텔의 민주당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공화당)의 재선 공작 하수인 5명이 붙잡히면서 시작됐다. 미국 언론과 의회, 특별검사의 2년여에 걸친 추적 끝에 1974년 8월9일 탄핵 위기에 몰린 닉슨 대통령의 사임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 과정에서 법무장관과 대통령비서실장 등 ‘대통령의 사람들’을 포함한 40여명이 감옥에 갔다.

1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4대 게이트’에도 대통령의 처조카를 비롯해 수석비서관과 검찰총장, 법무차관 등 ‘대통령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구속자도 70여명이나 된다. 빼놓을 수 없는 공통점은 사건 관련자들이 숱한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함께 식사하고 돈까지 받고도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이”라고 안면을 바꿨지만 구속된 수석비서관 출신 법무차관. 낮에는 “잘 모른다”던 사람을 저녁에는 “국익 차원에서 도와줬다”고 말을 바꾼 수석비서관. “특검 수사에서 나올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장담했지만 남동생과 여동생이 구속되고 자신도 조사 대상이 된 검찰총장.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던 대통령의 처조카. 거짓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자들의 거짓말도 대단했다. 로널드 지글러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하찮은 빈집털이 사건’이라고 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밥 돌 공화당 상원의원은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한 워싱턴포스트를 조지 맥거번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대리인이라고 몰아붙였다.

거짓말은 전염성이 있다던가. 공무원들 사이에 비리가 드러났을 때의 대처 요령으로 ‘1도 2부 3수’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1차로 도주하고, 2차로 부인(거짓말)하고, 그래도 안 통하면 3차로 수습하라는 뜻이다. 거짓말로 그치지 않고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겠다고 ‘협박’하거나 소송을 제기해 더 이상의 보도를 막으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거짓말이 넘치다보니 참말이라도 믿기 어렵게 됐다. ‘국익’을 위해 대통령수석비서관과 국가정보원 2차장이 나서고 군과 해양경찰까지 개입한 수십조원 규모라는 보물찾기 사업을 대통령과 국정원장은 몰랐다는 말이 그것이다. 거짓말이라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참말이라고 믿기도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반응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언론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기자들은 전통적으로 정치인과 공직자의 비리를 캐려면 ‘돈과 여자 관계를 추적하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미국 언론의 새로운 구호는 ‘거짓말을 찾아라’가 됐다. ‘비리 있는 자는 거짓말을 한다’는 일반원칙이 확인됐기 때문이었다.

4대 게이트 관련자들은 수억, 수십억원을 챙긴 과거의 권력형비리에 비하면 자신들의 비리는 ‘깃털’처럼 가볍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와 국민의 수준이 변했음을 알아야 한다. 거짓말 때문에 공직을 잃고 ‘거짓말쟁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됐음을. 언론도 거짓말에 대해 좀 더 엄격해져야 한다. 그리고 ‘거짓말 사냥’에 나서야 한다.

진실의 힘이 거짓말에 농락당할 정도로 가벼워서야 되겠는가. “정부의 잘못을 은폐하는 것은 잘못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이 남긴 말이다.권순택기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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