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북스]아버지와 아들의 엇갈린 애증

  • 입력 2002년 2월 15일 17시 41분


견훤과 신검, 흥선대원군과 고종, 중종과 세자(훗날의 인종).

최근 TV사극이 그리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은 제각기 갈등과 애증, 넘어서기의 의지로 가득하다. 철석같은 의지의 대상이자 자애로움의 표상인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그리는 아버지는 역시 전통적인 자애의 아버지상. 슬픔과 어려움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상이다.

‘아버지’ ‘가시고기’ 등 부정(父情)을 그린 소설의 성공이 이를 증명한다.

전원의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핵가족화와 맞벌이, 사교육의 증대가 어머니에게 더 많은 역할을 부여하면서 전통적 아버지의 역할도 여러 가지 질문에 직면해 있다.

최근 출간된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김영진 지음·황금가지)와 ‘위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폴크마르 브라운베렌스 외 지음·휴머니스트)은 사회상황과 맞물려 다양하게 전개되는 아버지의 역할을 조망하고 새로운 인식의 공간을 열어준다.

‘위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은 독일 역사상에 나타난 대표적 부자상을 유형별로 소개한 책. 제목의 ‘위대한’은 뒤에 이어지는 ‘아버지’를 꾸며주는 수식어일 뿐 그 뒤에 이어지는 ‘아들’까지를 꾸며주지는 못한다. 아버지를 이어 위대한 인물로 자리매김한 사회민주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있는가 하면, 성공은 했지만 콤플렉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좌초한 W. A. 모차르트와 클라우스 만, 부친의 광휘 밑에서 빛을 잃어버리고 몰락한 아우구스트 폰 괴테도 등장한다.

빌헬름 1세에서 프리드리히 3세, 빌헬름 2세로 이어지는 통일독일 세 황제들의 부자관계는 권력관계 이면에 존재하는 첨예한 애증의 실제를 보여준다. 강력한 군주 빌헬름 1세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리히 3세는 부친의 국가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국 왕실 출신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는 재위 99일만에 사망하고, 아버지에 반항적인 반면 할아버지를 역할모델로 받아들였던 빌헬름 2세가 반동정치를 실시해 나라를 1차 세계대전의 파멸로 이끌어들이고 마는 것.

독일 역사상의 유명한 아버지와 아들들

옮긴이 안인희는 역자 서문에서 책의 주인공들이 계몽주의 시대의 주인공들이라는 점을 중시한다. “새로운 시대의 이념은 아들 세대의 입장을 대폭적으로 강화했다. 젊은 세대는 쉽게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질서에 저항한다. 크로노스를 제거하면서 올림포스 신들의 아버지가 된 제우스처럼, 세대갈등이 격화되면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에서는 이보다 한층 한국적인 현상으로서의 세대갈등이 조명된다. 아들을 독립된 존재로 간주하는 서구와 달리 한국에서는 아들을 아버지와 분화되지 않은 종속적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꿈과 좌절된 소망을 건다. 기대만큼 따라오지 못하면 아들은 ‘못난 아들’이 되고 만다. 아들도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투쟁을 해보지만 독립이 가져올 두려움과 애착의 감정 때문에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들게 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저자는 ‘위엄을 지키되 군림하지 않는 아버지, 사랑하되 소유하려 하지 않는 아버지, 베풀어 주되 복종을 대가로 하지 않는 아버지, 자기 틀에 맞추지 않고 자녀의 욕망을 최대한 존중하는 아버지, 큰 기상을 심어주는 아버지’를 오늘날 한국의 아버지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덕목으로 결론짓는다.

부자관계의 일반론을 다룬 책이 생각만큼 폭넓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앞에 소개한 두 권의 신간을 제외한다면, 개인적 체험을 옮겨놓은 세 권의 책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줄 만 하다.

미국의 저명 에세이스트 레오 버스카글리아가 지은 ‘아버지라는 이름의 큰나무’ (홍익출판사)는 잔잔한 감동으로 1999년 출간 당시 화제를 모은 책. 초등학교 중퇴 학력으로 단돈 67센트를 들고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무식한 아버지였지만 ‘사람의 가장 큰 죄는 아침에 눈뜰 때부터 밤에 잠들 때 까지 아무 것도 배우지 않고 침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주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장 값진 유산인 ‘정정당당하게 사는 길’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는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에도 내용 인용된 유명한 서간문. 독선적이고 억압적이었던 부권의 행사가 작가 카프카에게 두고두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글 속에서, 저는 평소에 직접 아버지의 가슴에다 토로할 수 없는 것만을 토로했지요. 그건 오랜 기간에 걸쳐 의도적으로 진행된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이었습니다”라고 작가는 고백한다. 분명 본받아선 안될 ‘반면교사’이지만 억압적 아버지 없이 훗날의 작가 카프카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 또한 남긴다.

연암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나의 아버지 박지원’(돌베개)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기록함’이란 뜻인 ‘과정록(過庭錄)’을 국역한 책. 문학가로서의 부친의 인간적인 모습과 목민관 시절의 흥미로운 일화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을 기록한 전기라기 보다는, 애정의 마음이 넘치는 아들의 눈으로 그린 대학자의 풍모가 흥미와 감동을 동시에 안겨준다.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 바람직한 부자관계와 관련된 읽을만한 책들

위대한 아버지와 아들의 초상
(폴크마르 브라운베렌스 외 지음,휴머니스트)

계몽주의 이후 독일사회에 출현한 각분야 거장들의 다양한 부자관계 추적

한국의 아들과 아버지
(김영진 지음, 황금가지)

동서양의 전통적 가족관의 차이를 설명하고 변화하는 현대 사회상 속에서의 바람직한 가족관계를 제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정약용 지음, 창작과비평사)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 강진에서 두 아들과 형님에게 보낸 서간문. 절절한 부정과 깊이있는 세계관을 엿볼 수 있음

아버지라는 이름의 큰나무
(레오 버스카글리아 지음,
홍익출판사)

교육받지 못한 이민자였던 부친에게서 성실과 정직이라는 미덕을 배웠다고 회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문학과지성사)

폭압적이었던 아버지에게 보내는 서간문. 표현주의 명작가의 내면과 가족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

나의 아버지 박지원
(박종채 지음, 돌베개)

연암 박지원의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회고한 ‘과정록’을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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