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포커스]620만 자영업자 “멀고먼 신용대출”

  • 입력 2002년 2월 4일 18시 11분


고교교사 출신으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김성진씨(55·서울 관악구 봉천7동)는 2년전 슈퍼마켓을 인수하면서 인근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 했지만 “담보도 없고 매출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근거로 돈을 빌려주느냐”며 거절당했다. 어쩔 도리가 없어 사채를 얻어 썼다. 사채금리가 너무 높아 그간 몇 차례 은행을 찾아가 “한달 매출이 3000여만원에 이르니 신용대출을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다행히 두 달 전 신용금고에서 돈을 빌릴 수 있어 고금리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손님이 많기로 소문난 숯불구이 가게주인 김모씨(42·서울 서대문구 홍제동)는 “상인들은 거래은행 외에서는 신용대출을 얻기가 힘들다”며 “신용만 있으면 어느 은행에서나 신용대출을 쓸 수 있는 직장인들과는 영 딴판”이라고 말했다.

작년부터 은행이나 보험 등 금융기관의 신용대출이 크게 늘고 있다. 그러나 김씨 같은 620만명의 자영업자에게 은행 문턱은 여전히 높다. 중소기업체 종사자들도 마찬가지다. 신용으로 100만원도 빌리기가 힘들다.

신용대출은 공무원, 전문직 종사자, 대기업 회사원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 은행의 신용대출 승인율은 평균 30%정도지만 자영업자는 10%대에 불과하다.

▽은행의 개인신용평가시스템(CSS)〓외환위기 이전까지 은행은 대부분 담보대출만 취급해왔기 때문에 ‘어떤 고객에게 담보 없이 얼마를 빌려줄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내부기준조차 거의 없었다. 대출청탁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담보 없이 돈을 빌리는 혜택을 누려온 것. 대출이 이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연체율이 4∼5%에 이르렀고 외환위기 직후에는 8%대로 치솟기도 했다.

외환위기 이후 98년경부터 은행권은 고객의 직장, 직책, 소득, 근무연수, 집 소유여부, 결혼여부 등 20개 정보를 기준으로 컴퓨터가 신용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보통 고객별 신용등급은 15단계로 나눠지며 9등급 이상부터 신용대출을 쓸 수 있다. 이른바 ‘개인신용평가시스템(Consumer Scoring System)’으로 은행별로 수십억원씩 투자한 것이다.

신한은행 개인금융지원실 이대현 차장은 CSS시스템을 “어떤 특성을 가진 고객이 돈을 잘 갚는지 확률적으로 분석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CSS시스템을 도입한 은행들은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다. 조흥은행의 경우 CSS시스템을 도입한 이후 신용대출 연체율이 0.8%까지 떨어지는 등 각 은행의 연체율은 1%대를 유지하고 있다.

▽신용시스템의 소외자〓그러나 현행 CSS시스템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똑같은 직업과 소득을 가지고 있더라도 개인별 특성 때문에 신용도가 다른 법인데 이를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것. 자신이 속한 직업군의 신용도가 낮으면 자신의 신용점수도 덩달아 낮아진다.

결국 직업이나 직장이 신용점수를 좌우하는 평가체제에서는 소득이 경기에 따라 자주 변하는 자영업자나 직장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중소기업 근로자는 모두 불리한 평가를 받게 된다. 특히 실질 소득과 세무서 신고소득의 차이가 큰 자영업자의 경우 신용평가 때도 그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조흥은행 소비자금융부 김덕열 차장은 “은행이 개별 고객의 신용도를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아직 충분히 축적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한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근로자는 본인의 신용도를 직접 입증하지 않는 한 불리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개인신용평가시스템〓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대출을 얻기 위해 복잡하게 서류를 작성할 필요가 없다. 이미 금융기관이 그의 신용정보를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다. 고객의 이름과 사회보장번호(주민등록번호에 해당)만 입력하면 대출 희망자의 대출이용 역사, 금융기관 계좌 및 예금잔고,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체납 및 과징금 관련정보, 부동산정보 등 각종 신용정보가 드러난다. 한 개인의 신용정보가 수십 페이지에 이르기도 한다.

최근 미국의 신용평가시스템을 연구하고 돌아온 한국신용정보 소비자정보실 임용훈 팀장은 “본인이 과거 금융기관과 거래하면서 쌓아놓은 과거 실적에 따라 신용도가 결정되기 때문에 고객이 자신의 신용점수에 불만을 제기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국민은행 소비자금융팀 백태흠 팀장은 “미국은 일찍이 금융기관이 자발적으로 신용평가회사에 각 개인의 금융정보를 제공하고 신용평가회사는 이를 종합 가공해 다시 각 금융기관에 분배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았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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