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호택]비리로 물드는 권력의 낙조

  • 입력 2002년 1월 21일 18시 30분


김대중 대통령은 야당 시절에 공직자는 부(富)와 귀(貴)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아직도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한국에서 가장 확실한 부귀공명(富貴功名)의 길은 정치 입문과 고시 합격이다. 선거라는 힘든 전투에서 이기기만 하면 정치는 고시보다도 훨씬 고속으로 달리는 영달의 길이다.

고위 공직자들 중에는 관직을 조선시대의 벼슬자리에 빗댄 재담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대통령수석비서관은 승지이고 장관은 판서이다. 승지가 판서보다 낫다는 말은 지금도 통한다. 모든 권력이 청와대로부터 나오고 판서들도 승지 눈치를 봐야 하는 판에 힘 센 승지에게 줄을 대려는 행렬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구린내나는 일부 장관-수석▼

언론에서도 국무총리를 곧잘 재상이라고 부른다. 검찰은 왕명을 받들어 국사범을 처단하던 의금부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 속에서 검찰권의 독립은 부지하세월이다. 지방도시가 소란해졌던 검찰총장 행차 준비를 보더라도 한국은 관존민비와 사농공상의 봉건적 서열이 유지되는 사회다.

미국의 23선 하원의원은 강철 고관절이 금속탐지기에 걸려 내의 바람으로 보안검색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는 의원이나 장관을 귀빈실에서 특별히 모시기 때문에 이런 비례가 발생할 여지가 없다.

인천공항 귀빈실 이용 명부에는 전직 고관들도 적지 않게 등재돼 있다. 이코노미 클래스 승객들 틈에 줄을 서 보안검색과 세관검사를 당하는 일이 치욕스러워 청탁을 해서라도 반드시 귀빈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귀빈실을 이용할 법적 근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선진 민주사회에서 공직의 길은 부도 아니고 귀도 아니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로 가면 연봉 수십억원을 받을 사람들이 적은 봉급을 받고 장관 일을 하는 것을 나라를 위한 봉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시 열풍이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해마다 이과 지망생이 줄어드는 것은 문과 출신에게 돌아가는 부귀공명의 파이가 크기 때문이다. 서울대는 공대생들까지 전공을 팽개치고 고시 준비를 하는 거대한 고시학원화하고 있다. 이런 문관 숭상의 풍토를 갈아엎지 않으면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는 어렵다.

얼마 전 한 기업인으로부터 김영삼 정부 시절 검찰에 불려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 대통령에게 몇 번씩 갖다드렸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검사가 한두 푼도 아니고 수십억원이나 되는 돈을 바치면서 몇 번인지 모르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다그쳐서 땀을 뺐어요.”

그는 대통령이 재벌그룹 총수를 독대해 통치자금 명목으로 돈 보따리를 받는 관행을 단절한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루어놓은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청와대를 떠나며 주변 사람들에게 수억원 또는 수천만원씩 나누어주고도 수천억원을 챙겨 사저로 돌아갔는데 문민 정부 이후에는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주는 기업인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석비서관들이 바쁘게 챙기는 바람에 칼국수로 상징되는 대통령의 용단이 빛을 잃어버렸다. 청와대 살림을 사는 수석비서관은 너무 여러 군데서 받아 정권이 바뀌자 교도소 입소와 출소를 반복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공직자 사정을 담당하는 비서관이 조사 대상 기업인으로부터 흘러온 돈을 받았으니 수석비서관 때문에 대통령이 피해를 본 측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게 됐다.

▼공직은 국민 위한 봉사인데…▼

김영삼 정부 말기에는 한보 태풍이 정관계를 강타했다. 김대중 정부 임기 말에는 부귀공명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던 사람들이 몇 푼 ‘부’를 챙기다가 줄줄이 패가망신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

정권을 잡으면 천하를 얻은 듯 위세 당당하던 사람들이 집권 5년 차로 접어들면 여권과 미국 비자를 챙겨놓는 것이 한국형 정권교체의 쓸쓸한 풍경이다. 붉게 타오르는 낙조(落照)는 아름답지만 권력의 낙조는 지저분한 비리 스캔들로 얼룩진다.

정초에 대선 주자의 집마다 눈도장을 찍으려는 정치인들로 문전성시였다. 대선에서 승리하면 고급 승용차가 딸리는 수천개의 자리를 전리품으로 차지하게 되니 유력한 후보일수록 부귀공명을 탐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공직의 길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집권 5년 차의 비극은 차기 정부에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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