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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년 1월 9일 18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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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홍콩에서 일어난 단순한 살인사건이 이처럼 오랫동안 대공사건으로 은폐 조작된 데는 당시 안기부와 외무부 일부 실세들의 빗나간 정권 안보관과 부도덕성에 그 원인이 있었다. 지난해 언론에 의해 이 사건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고 경찰수사가 진행되었으나 국정원 간부와 경찰청장의 공모로 수사 중단사태에 이르기도 했다. 거대한 국가권력의 비호를 받은 수지 김 사건은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 15년이 지나서야 사건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었다. 김승일 전 국정원 간부와 이무영 전 경찰청장은 이 일로 이미 구속 기소된 상태다.
▼反인권적 행위 용서안돼▼
하지만 정작 수지 김 살해사건의 은폐조작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범인도피나 직무유기죄의 공소시효 7년을 훨씬 넘겨 자신의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간첩 가족의 누명을 쓰고 15년 동안 애달픈 삶을 살아온 유족들로서는 참으로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 대한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나서기로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있으며, 권력기관이 개입한 이런 종류의 은폐범죄가 바로 그 일례라는 것이다. 민주당 함승희 의원도 이런 유의 반인륜·반사회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배제특별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의원 서명 작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정권은 변해도 과거 권력의 불법은 남는다. 이 과거의 불법을 청산해야 법과 질서를 새롭게 세울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묻혀진 과거 권력적 범죄들의 실체를 캐내어 인권과 ‘바른 법’을 세우는 일은 현재의 우리 삶뿐만 아니라 미래의 공동체 삶을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다.
문제는 세월은 빨리 흐르는데 진상규명은 생각대로 빨리 진행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세월이 지날수록 과거의 불법은 땅속으로 점점 가라앉고, 그 은폐된 땅 위에 공동체적 삶이 무성하게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땅속에 감춰진 진실을 캐기 위해 땅 위에 세워진 고층건물을 해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법질서는 일찍이 법적 안정성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공소시효 제도를 마련했고, 실제 15년이 지나면 사형에 해당할 범죄라도 소추할 수 없게 된다. 속상한 일이지만 정상적인 사회는 공소시효의 기대이익을 수사망을 피해 도주한 범법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상례다.
문제는 법 감정을 격분시키는 극도의 권력적 불법에 대해서도 법적 안정성을 빌미로 공소시효의 보호막을 인정해야 하느냐다. 법적 안정성과 정의 사이의 모순이 극심한데도 불구하고 권력적 불법을 통해 체계적으로 인권을 유린한 범법자들의 기대이익과 신뢰를 보호해야 옳은가. 참을 수 없는 부정의의 결과를 어떻게 해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獨-佛선 공소시효 적용안해▼
일찍이 이런 모순에 직면했던 독일에서는 나치 과거청산의 초기, 망명에서 돌아온 저명한 법철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의 ‘실정법의 정의에 대한 위반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을 때, 이 부정의한 내용의 법률은 정의에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공식으로써 돌파구를 열었다. 1990년대 독일 통일 후 구동독의 국가범죄에 대한 과거청산에서도 이 공식은 판례에 의해 활력을 되찾았다. 공소시효 때문에 극단적인 부정의를 가져오는 예외적인 반인권 범죄에 대해서는 비록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을지라도 법률로써 공소시효를 배제하거나 새로운 정지사유를 부가하는 것이 전적으로 가능하다. 심지어 프랑스판례는 ‘시효는 유효하게 소추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진행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통해 법률의 명문 유무와 관계없이 사실상·해석상의 장애사유까지 정지사유로 널리 인정하고 있다.
왜곡된 진실을 땅에 묻어두고, 억울한 이들의 한숨이 하늘에 사무치는 곳에서 공동체의 행복과 번영을 기대할 수는 없다. 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를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억울한 죽음들의 하소연에 귀기울여야 할 때다.
김 일 수 고려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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