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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8일 17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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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굳이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는 그림집이다. 저자는 신부이기도 하지만 재료와 장르를 넘나들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회화 판화 유리화 조각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예술가다.
책은 판형도 크고 왼쪽 면은 글, 오른쪽 면은 얼굴 그림들이 하나씩 차지하는 식으로 편집돼 있다. 붓과 펜의 터치가 거칠게 드러난 조 신부의 ‘얼굴’들은 독특한 느낌을 준다. 추상화에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로 과감한 생략과 과장, 이목구비가 제 멋대로인 ‘얼굴’들은 국어 사전 한 장을 찢은 듯 한글들이 촘촘하게 나열돼 있는 바탕 도화지를 배경으로 하나씩 들어 앉아 있다.
언뜻 거부감마저 일 정도로 화석화된 얼굴이 하나씩 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책 중간쯤부터 였다. 조 신부가 그린 얼굴들은 각자 그들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시대 자화상이다. 착하고 품위있는 얼굴도 있고 울고 웃는 얼굴들도 있었다. 고통속에서 아우성치는 얼굴도 있고 삶의 환희로 가득한 얼굴도 있다. 직업도 다양하다. 사제, 스님, 음악가, 시인, 노동자, 구두닦이…. 신기한 것은 그림을 깊게 음미할수록 유독 눈동자가 산사람의 그것처럼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130점 ‘얼굴’ 그림 옆에는 주인공들과의 인연 혹은 느낌을 적은 저자의 단상이 담겨있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콘크리트 숲속의 독수도자(獨修道者)’라는 제목의 글을 보자.
‘모든 면에서 H는 나와 다르다. 매사를 근원적인 질문으로 삶의 핵심으로 돌리는 그의 근본주의적 태도앞에서 나는 당황하기 일쑤였다. 그는 출가인으로서의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었다.
H는 50년 한 생을 참으로 가난속에 살다 갔다. 돈 명예 권력 건강 어쩌면 자신의 생명마저도 철저한 가난이었다. 해맑은 웃음, 거짓 없는 대화, 해학섞인 자유로움…. 그는 이 땅의 교회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꼈고 이 시대 수행자들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삶 자체를 존중했다. 온갖 욕망의 굴레로 점철된 이 세상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남탓을 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삶은 내가 풀어 낼 화두이다.’

조 신부의 글에는 인간실존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깊은 울림이 있다.
‘어떤 사랑을 하느냐에 따라 어떤 인간이냐가 결정된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그가 무엇을 진정으로 그리워 하느냐를 보고 알 수 있으며 그 인생의 아름다움은 그가 이 그리움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믿게 하는 교회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두려움이 있는 곳에 종교는 없다. 두려움을 통해 얻은 것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만 존재한다.’ ‘삶의 형태는 삭발로 변모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맺을 수밖에 없는 온갖 인연의 고리는 하늘의 도움없이 스스로 끊을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눈이 지닌 계산법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로 시작한다.’….
‘삶은 끝나는 순간까지 결코 해고당하는 일이 없는 아름답고도 처절한 선물’이라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지난 한 해 삶과 그 삶속에서 맺었던 인연들을 새겨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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