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유치환의 시세계 좇는 풍경여행 '청마풍경'

  • 입력 2001년 12월 7일 18시 28분


1957년 대구에서 만난허만하(왼쪽)와 유치환
1957년 대구에서 만난
허만하(왼쪽)와 유치환
청마 풍경(靑馬風景)/허만하 산문집/272쪽 9000원 솔

“시보다 인생을, 인생보다 진실을.”

1961년 가을, 시인으로 출발한 후배의 시화전에 들른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1908∼1967)이 방명록에 남긴 잠언이었다. 시에 대한 청마의 자세를 볼 수 있는 장면은 지금은 노시인이 된 청년 허만하(許萬夏·69)에게 큰 울림을 남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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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허씨는 청마에 대한 짝사랑을 반백이 될 때까지도 중단하지 않고 있음이었다. 청마의 대표시 ‘깃발’의 느낌이 99년 30년만에 낸 두 번째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솔)와 겹쳐지는 것은 그리 무리는 아닌 듯하다.

이 책은 허 시인이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써운 청마에 대한 산문 29 편을 골라 3부로 나누어 실은 것이다. 허 시인은 여기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청마의 삶과 예술, 철학에 대한 깊이 있는, 그리고 실증적인 기록을 하나하나 검토해간다. 허 시인은“전기문학이란 한 인간의 풍경을 독창적인 방법론으로 재편성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청마의 인생에 대한 웅숭 깊은 해석이 담긴 보기 드문 평전이지만 한편으로는 노시인이 푯대로 삼은 선배 문인에 대한 짝사랑의 연서로도 읽힌다. 고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시적(詩的) 욕망의 한 자락을 슬쩍 드러내는 것은 자기 시업(詩業)의 치열함을 벼리는 고백서로도 보이게 한다.

책 곳곳에서 허 시인은 일부 시인과 평론가에 의해 청마는 “유교주의라는 고정관념에”에 묶여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허만하)는 청마의 시 세계에서 강렬한 서구적 정신 구조를 읽어온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청마가 노장적이라느니 유교적이라느니 하는 흔히 있어온 견해와는 달리 그의 시 세계에서 실존주의의 전형을 읽어온 것이다. 물론 그가 의식적인 실존주의자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그의 시에서 강렬하게 풍겨오는 실존의 심연을 느껴왔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시의 현저한 특징의 하나라고 지적한다.”

청마에 얽힌 에피소드를 통해서 엄정한 시어의 뒤편에서 헐렁하게 풀어진 고인의 인간됨을 묘사한 것도 그에 대한 애정의 발로일 터. 그가 소개하는 유치환의 호 ‘청마(靑馬)’의 연원도 그중 하나다.

허 시인은 도쿄 유학시절 허물없이 지냈던 영문학자 정인섭이 유치환의 얼굴이 길음하여 말상 같다며 ‘마면(馬面)’이라 불렀던 별명에서 연유했다는 일설을 소개한다. 이를 노작 홍사용이 “자네가 마면이니 청마라함이 좋지 않을까”해서 ‘청마(靑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한가지 더. 허 시인의 여유로운 문장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직접 읽어보는 독자들만이 즐길 몫이다. 시집 ‘비는 수직으로…’에 응축된 언어들이 좀더 편한 산문체로 풀려 시에 문외한인 이들에게도 예술적 향취를 흠뻑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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