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진우]국민은 지쳤다

  • 입력 2001년 12월 3일 18시 12분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다. 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는 러시아 핀란드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러시아는 눈발이 날리고 춥더라”고 했다. 한국도 겨울이다. 날은 추워지고 세상 분위기는 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을 보듯 을씨년스럽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어딘가 마음 붙이고 희망을 가져볼 구석이 있어야 할텐데 도무지 그런 게 보이지 않는다.

결국 국민 부담이 되는 150조원의 엄청난 공적자금이 ‘먹는 ×이 임자’ 격으로 여기저기서 새나갔다는 데도 내 책임이라며 나서는 정부 관리 한 명 없다. 무슨 합동조사단을 만듭네 하고 뒷북치기나 요란할 뿐이다. 야당이 탄핵을 벼르는 검찰총장은 오히려 “검찰이 뭘 잘못했느냐”며 기세 등등하고,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검찰총장의 국회 출석에 대해) 대통령이 간섭하는 것은 검찰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국민의 눈에는 더 훼손시킬 검찰의 독립성이 아직 남아 있을까 싶은데 대통령은 ‘검찰의 자주적 판단’을 강조하니 짐짓 검찰총장 역성드는 것으로 비치지 않을지 모르겠다.

▼“더 이상 흔들지 말라”▼

따지고 보면 이런 거대담론과 현실정치의 괴리, 다시 말해 대통령의 ‘교과서적인 말씀’과 실제 상황이 너무 동떨어진 데서 사회적 불신과 냉소가 쌓이고, 그것이 권력의 도덕성 위기와 맞물리면서 어느 한 곳 마음 붙일 수 없는 정신적 공황을 빚어낸 게 아니던가. 지역감정을 걱정하는 뒤편으로 요직의 지역편중 인사가 거듭되어온 현실, 권력기관마다 ‘믿을 수 있는 내 사람’을 골라 심는 풍토에서 자라난 ‘끼리끼리 커넥션’,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부패의 악취, 그런 것들이야말로 다수 국민이 ‘국민의 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 근본 원인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사적(私的) 정치’야말로 이 정권이 애초에 끊어버렸어야 할 질긴 사슬이었다.

뒤늦게 강행처리를 하지 않기로 하고 물러섰지만 한나라당이 교원정년 연장을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려 한 것 역시 ‘아니올시다’였다. ‘집권 야당’의 세를 과시한 첫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적격이 아니었다. 국민의 65%가 안 된다고 하고, 심지어 현직 교사들의 과반수마저 반대하는 사안이니 ‘국민 우선의 정치’와도 박자가 맞지 않는다.

물론 이 정부의 교육정책이 잘 됐다는 것은 아니다. 실례를 들어보자. 26년5개월 동안 교사로 일하던 C씨(50·여)는 지난해 8월 말 명예퇴직금 6000만원을 받고 학교를 떠났다. 월급과 연금 차를 계산해 보면 5년을 더 근무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 무렵 앞으로 명예퇴직금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연금도 기금이 고갈돼 줄어들 것이라는 등 악소문이 무성했다. 교사를 개혁의 대상처럼 몰아붙이는 분위기에서 더 이상 교직에 머무를 의욕도 없었다. 비슷한 나이의 여교사들은 이미 상당수 학교를 떠나고 없었다.

99년 이후 C씨처럼 학교를 떠난 명예퇴직자가 정년퇴직자의 세 배 가까운 숫자인 것을 보면 오늘의 교원 부족현상은 단순히 정년 축소 때문이 아니라 교사들의 자존심과 사기를 아랑곳하지 않은 ‘오만한 교육정책’ 탓인 게 명백하다. 그러나 서울 한 고교의 K교사(51·남)는 “정년을 1년 더 올려주든지 말든지 제발 교직사회를 더 이상 흔들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별 실효도 없이 교사들 사기만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국정 운영 청사진 보여야▼

교원정년 연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검찰총장의 국회 출석이란 ‘당연한 요구’조차 ‘거야(巨野)의 정부 흔들기’로 비쳐졌다. 그러다 보니 국민은 어느 쪽이 옳고 그르고를 따지기 앞서 계속되는 정쟁(政爭)에 염증을 낸다. 최근 여러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권 후보 1순위’로 부각된 이회창씨는 이제 야당 총재로서 정부 여당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국민의 뜻에 귀기울이고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감싸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나라를 앞으로 어떻게 끌어나갈지 청사진을 내놓아 국민을 안심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국민이 마음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행여 ‘반(反) DJ 정서의 반사이익’에 기대어 다음 대권을 잡으려 한다면, 설령 그렇게 해서 정권이 바뀐다 한들 이 나라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전진우<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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