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양준혁의 몸값?

  • 입력 2001년 11월 25일 20시 03분


영원히 입고 있을 것으로 믿었던 푸른 유니폼을 벗게 된 98년의 겨울 이후, 해마다 양준혁의 겨울은 순탄치 못했다. 출중한 기량과 카리스마로 그라운드에서 팬들을 격동시키는 그는 스토브리그에서도 뉴스의 초점이었다. 그가 선수생명을 담보로 걸고 출범시켰던 선수협은 본 궤도에 올라섰고, 용병수입 문제를 둘러싼 '오너'들과의 힘겨루기는 일단 2002시즌 종료 후로 미루어졌다. 69년 생인 그는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34세가 된다. 한 해가 갈수록 몸 상태가 달라질 그는 2002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야 '대망의 10시즌'을 채우고 팀 동료 홍현우, 과거 그가 라이벌로 지목했었던 김기태를 능가하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올 동계훈련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다. 아마 그도 올 시즌 만큼은 '조용히' 보내며 훈련에만 열중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야구 위원회 산하 이사회의 FA자격 취득요건 완화결정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마무리 훈련에 열중하던 그에게 더 할 나위 없는 福音이었으리라... 올 시즌의 그는 .355의 생애 최고타율을 기록하며 9년 연속 3할, 네 번째 타격왕 등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그의 배포는 세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36억원. 그러나 트윈스 구단의 대응 또한 예상외의 것이었다. 구단의 대응이 '데려갈 테면 데려 가보라'는 자신감에 바탕한 '노회함'인지, 아니면 양준혁을 포기한 것인지는 좀 더 두고봐야 알 일이다. 어쩌면 올해도 양준혁의 겨울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팬들의 여론은... 양준혁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는 못한 편이다. 적어도 지금까진 말이다. 그의 '과욕'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양준혁 본인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법도 한 '영양가'의 문제와 '선수협' 결성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사적이익의 도모'와 같은 해묵은 이야기까지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 필자가 양준혁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양준혁의 몸값이 얼마냐는 것은 필자에겐 관심 밖의 일이다. 야수로서의 그에 대한 사람들의 '가치평가'는 저마다 다르기 마련이고, 그의 몸값은 '市場'이 결정해 줄 일이다.

83시즌의 장효조, 89시즌의 박정현, 93시즌의 양준혁, 96시즌의 박재홍... 루키시즌의 '빅뱅'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며 슈퍼스타로 자리매김한 선수들이다. 이미 절정에 달한 기량을 갖춘 채 뒤늦게 프로에 입문했던 장효조의 경우를 제외하면, 93시즌의 양준혁은 '사상 최고의 루키'로 불리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었다. 8개구단의 평균 방어율이 3.27을 기록한, 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마운드의 위세가 드높았던 시즌에 그가 106경기에서 기록한 .341의 타율, 23홈런, 90타점, 1.034의 ops는 '경이' 그 자체였다. 그의 MVP등극을 막은 것은 김성래도, 선동열도 아닌 '방위병'이란 그의 신분이었다. 그에게 경기 출장횟수가 부족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상 첫 '루키 MVP'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루키시즌이 영광으로만 가득한 것은 아니다. 시즌 내내 불길을 뿜었던 그의 방망이는 한국시리즈에서 맞닥뜨린 조계현과 선동열의 앞에선 침묵을 지켰고, 라이온즈의 '여섯 번째 좌절'의 주범으로 지목 받게 된다. 그에게 '원죄'처럼 따라 다니는 '영양가' 논쟁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94-95 시즌의 그는 '3할 타자'로 전락(?) 한다. 본인 스스로... 3할 채우고 타점 올리는 데만 주력했던, 그리 신명나지 않았던 시즌으로 기억하는 그 시간 동안, 라이벌 이종범은 '한 사람의 야수'가 구현할 수 있는 '극치'의 것을 선보이며 그의 위치를 뛰어 넘었다. 물론 양준혁의 '침체기'도 96시즌이 시작되면서 끝이 났다. 30-30 클럽의 신기원을 달성한 박재홍의 센세이션, 하위권에 머무른 팀성적 탓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그는 다시 '최고타자'의 자리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97시즌... '양준혁의 그늘'을 벗어나기 시작한 이승엽과 그가 구성한 듀오는 한국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자리잡는다.

양준혁의 선수 생활 후반부를 규정짓는 역마살의 조짐은 97시즌 이후부터 였을 것이다. 이미 양준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한 이승엽은 당시 팀내 최고의 클러치 히터로 인정받았고, 양준혁의 '영양가'에 대한 논쟁이 다시 재연되기 시작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였지만... 당시 '위기설'에 휩싸였던 삼성그룹의 재정은 그의 충만한 긍지와 자신감을 연봉으로 보상해주지 못했다. 라이벌 이종범의 해외진출에 자극 받은 그 또한 일본진출 허용을 요구하는 한편, 연봉조정 신청을 제기하며 구단을 압박해 들어갔다. 타 구단 간판투수와의 트레이드說이 흘러나온 것도 그 즈음의 일이다. 98시즌의 이승엽은 대구, 경북의 'Mr. baseball'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양준혁은 연말 팀을 떠나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준혁의 삼성구단 입단은 대체로 美談으로 알려져 왔다. 평생 소원인 푸른 유니폼을 입기 위해... 절친한 친구와 같은 유니폼을 입기 위해...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군대까지 갔다오면서까지 라이온즈를 선택한... 대체로 그런 스토리다. 그러나 이제 蜜月은 끝났다. 미담으로 포장되었던 입단당시의 이면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구단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양준혁은 '선수가 노비입니까?'라는 감성소구적인 언어로 팬들의 정서에 어필해갔다. 만약... 그 해 겨울 양준혁이 해태가 아닌 다른 구단으로의 이적을 모색하는 등 '私心'을 엿보이지 않았다면 최근 몇 년 새에 급격히 이루어진 제도변천은 더욱 빨리 이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랬을 것'이란 이야기다. 양준혁이란 개인에게 그런 십자가를 '강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어찌되었든... 최고의 '전국구 스타'가 벌인 1개월 간의 장외농성은 상당한 파급효과를 가졌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듬해 2월, 새로운 시즌 오픈을 앞둔 한국야구위원회 산하 이사회는 FA제도의 도입에 합의한다. 프로야구 출범 16년만의 일이다.

푸른 유니폼을 벗은 후에도, 양준혁은 여전히 '훌륭한' 타자였다. 그러나 이전처럼 리그를 '제압'하지는 못한다. 그가 광주에서 생애 최다 홈런기록을 작성하는 동안, 이승엽은 '국민타자'로, 이병규는 '新 야구천재'로 등극한다. 마해영의 '기적'과 용병들의 지칠 줄 모르는 파워는 그의 '32홈런'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만든다. 팀 동료 장성호와 홍현우의 빼어난 활약도 그의 '중량감'에 대한 팬들의 '체감' 지수를 떨어뜨린다.

타이거즈 구단에서의 시즌이 마쳐진 후, 그는 1년 동안 남몰래 갈아온 칼을 뽑아든다. 2000년 1월 22일에 출범한 선수협의 결성에 가장 큰 動因이 된 것이 양준혁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당초 1기 선수협의 출범 당시, 이 단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빼놓지 않던 이야기 중 하나는... '평생 운동만 해온 선수들이 급조한 결사체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너무도 조직적이다'라는 것이다. 당시의 선수협이 얼마나 조직적이었는지는... 당시 현장에서 '20명이니 19명이니'하고 다투던 김기태와 유지현이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뜨자 와해직전까지 가는 모습을 지켜봤던 필자로선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곳 아니면 정말 오갈 데 없는 신세였던 쌍방울 선수단이 자리를 지켜주지 않았으면 아마 제대로 닻도 못 올리고 좌초되었을 것이다.) 물론 선수협의회의 구성에 앞서 '상당한' 정도의 준비와 사전 플랜이 만들어졌음은 확연했다. 각계와의 연계 및 협력 등에 양준혁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었음이 알려졌고, 이는 反선수협 노선의 주된 공격근거가 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소동와중에 그는 원하던 대로 줄무늬 유니폼으로 갈아입는데 성공한다. 갑자기 넓어진 홈구장, 부족한 동계훈련, 느려진 배트 스피드... 3할을 '수호'하기 위해 그의 스윙은 정교함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제 3의 용병' 양준혁을 통해 '4번 타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던 트윈스의 바램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루상에 주자가 있을수록 공을 더 고르고 컨택트 히팅에 주력하는 그의 '팀 공헌도'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오랜 논쟁의 소재이자,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클러치 히팅'의 문제... 팬들에게 '찬스에 강한 타자', '쳐줘야 할 때 쳐주는 타자'로 인식되는 선수들이 있다. 피상적인 인식의 세계에서... 아마도 박재홍은 그러한 '클러치 히터'의 이미지로 기억될 것이다. 반면 양준혁과 이승엽과 같이 '그렇지 못하다'고들 이야기되는 선수들이 있다.

양준혁은 물론 자신에게 덧 씌워진 그러한 이미지에 수긍하지 않는다. 실제로-적어도 트윈스로 유니폼을 갈아입고 난 후- 그가 '클러치 상황'에서 보인 타율과 타점생산력, 득점권타율 등을 나타내는 수치는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데뷔 이후, 소위 에이스 급 투수들과의 맞대결에서 거둔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다. 적어도 수치상으론 그러하다. 그렇지만 그 '반대 편'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기도 어렵다. 그의 영양가 논쟁의 출발점은 그가 출장하는 경기를 가장 많이 지켜보는 구단 프런트나 기자들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타율이나 타점, 득점권 타율과 같은 지표는 허구의 것이며, 진정한 팀 공헌도를 반영하지 못한다며 양준혁에 대한 불만을 종종 털어놓곤 하는 김성근 감독의 코멘트처럼, 수치와 지표로 나타나지 않는 승부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에서, 그 상황에 대처하는 중심타자로서의 그의 역량은, 그가 9년의 선수생활을 통해 보여준 개인기록 '만큼'의 탁월함에는 못 미치는 지도 모른다.

96시즌의 한국시리즈에서 유니콘스의 패인중 박재홍의 부진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한다. 2000시즌의 한국시리즈에서 유니콘스가 희대의 역전극을 허용했다면, 그 멍에는 박재홍과 박종호가 반반씩 나누어야 했을 것이다. '한 때' 최고의 클러치 히터로 자리 매김하며 양준혁의 위상을 위협했던 이승엽의 '영양가' 또한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이다. 아마와 프로팀이 망라된 '드림팀'이 계속 버전 업을 해가며 국제대회에 진출할 때마다 팬들과 기자들 사이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것이 '국제용, 국내용'의 구분이다. 10경기 미만의 단기전을 통해 야수의 '자질'에 대해 단정적으로, 때론 선정적이기까지 한 용어로 선수들을 분류하는 것이 '편하게' 야구를 즐기는 팬들의 私談에서라면 이해가 갈 일이다. 그러나 선수가 기계가 아닌 담에야 타격감의 기복이 있기 마련일진대... 스포츠 저널리스트들까지 '무책임한데다가 위험하기까지 한' 이분법적 잣대로 선수들을 분류하는 데 앞장서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 무대에 선발된 선수들은 그 10경기 미만의 대회보다 수십 배에 달하는 '시합'이라는 '샘플'을 통해 선발된 선수들인데도 말이다.

필자 또한 양준혁의 팀 공헌도가 그의 개인기록만큼이나 독보적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섯 차례의 포스트시즌에서의 실패, '절대적인 승부처'에서의 아쉬움 등으로 폄하하기엔 그가 지난 9시즌 동안, 1,104경기 동안 보여준 기량의 탁월함이 너무도 크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에게 아쉬움을 느낄 만한 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아쉬움'들을 인정하더라도, '타석'에 선 그는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최고'의 자리를 논할 수 있는 몇 사람 중 한 선수이다. 지난 20년의 한국프로야구사를 망라해서 말이다.

그에 대한 혹평과 비난이 야구외적인 문제, 선수협과 그의 사생활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양준혁이 선수협을 매개로 사적인 이익을 도모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고, 선수들이 참여하고, 팬들이 호응했던 선수협이 합리적인 권익추구의 틀에서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다. 양준혁의 '사적 이익'의 추구가 선수들의 '권익추구'의 틀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리고 선수들의 '권익추구'가 프로야구라는 '판'을 깨지 않는 것이라면 그 '사적 이익'의 추구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를 필자는 찾을 수 없다. 언젠가 그가 정선 카지노에 출입하며 하루밤 사이에 '판돈'으로 수천 만원을 날렸다는 '풍문'을 접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떠들어대는 선수들의 권익이란 게 별로 맘에 와 닿지 않는다'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차례 들을 기회가 있었다.

노동문제에 정통한 인권변호사 출신이며, '청문회 스타'로 명성을 얻었고, 집권당의 유력한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모 국회의원이 오래 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기자는 부인과 육박전을 종종 벌일 만큼 부부사이에 문제가 많다는 소문이 돌곤 하는 그 국회의원의 사생활, 부부가 따로 자가용을 '굴리는' 부유한 형편을 '문제' 삼으며 '그런 분이 어떻게 노동자의 아픔을 이해하며 그들의 권익을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물론 그 기자의 질문은 넌센스이다. 물질적 풍요와 거리가 있는 사람만이 노동자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래도 그러한 질문이 가능한 것은(물론 부적절하기 짝이 없지만) 그 국회의원은 국가지도자를 지향하는 공인이기 때문이다. 양준혁 본인에겐 아주 미안한 假定이지만, 양준혁에 대한 좋지 않은 '풍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우린 '공인'이긴 하지만 성직자도, 정치인도 아닌 별다른 도덕적 의무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한 체육인에게 너무 높은 도덕성을 강제하는 것은 아닌지... 하루밤 사이에 판돈으로 수천 만원을 날리는 사람이라도 '고용 관계'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불리한 선수들의 처지를 자각하는 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그런 사람에 의해 그러한 불합리한 관행이 바뀌어나가고 개선된다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구단간 선수를 트레이드 하기에 앞서 선수에게 통보하고 협의를 구해야하며, 에이전트의 활동까지 합법화 된 현재의 규약과 제도가 '양준혁의 私心'에서 비롯된 오프시즌의 왕성한 활동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이라면... 그의 사심은 비난이 아닌 존중받아야 할 것이 아닐런지...

그의 몸값이 필자에게 관심 밖의 것이긴 하지만, 36억원을 호기롭게 외친 것이 그리 슬기로워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 9년 간 1,104경기를 소화하면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선수이다. 단 한 번도 지속적인 경기출장에 위협이 될만한 치명적인 부상에 시달려 본 적이 없고, 34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체력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선수이다. 유니폼을 벗은 그는 어떤 사람인지, 개인적 친분이 없는 필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라운드에서의 그만큼 치열함을 갖춘 선수는 20년 간 프로야구를 지켜보면서 흔히 볼 수 없었다. 그는 '최고타자'의 자리를 당당하게 논할 수 있는 선수였고, 그 스스로의 자부심과 긍지를 36억원이라는 금액으로 '수치화'해서 나타냈을 것이다. 물론 '협상용'으로 말이다.

그의 실제 몸값은 market에서 결정날 일이다. 운동으로 먹고 사는 프로 선수가 호기롭게 던진 한 마디에 위화감을 느끼며 불쾌해 할 이유까진 없을 듯 하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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