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경영]신경제는 허구다 '부유한 노예'

  • 입력 2001년 11월 9일 18시 42분


부유한 노예/로버트 라이시 지음/384쪽 12900원 김영사

"밤에 퇴근하고 돌아오면 깨워 주세요. 아빠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어요.”

요즈음 많은 아빠들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어린이의 단순한 응석이 아니다. 무한한 기회와 풍요를 가져온 신경제(新經濟)에 대한 어린이의 무저항적 거부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의 노예가 된 가장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듣고 장관직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부유한 노예’를 써 신경제의 허상을 파헤치고 무너지는 가정과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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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제는 지난 10년 미국이 이루어 낸 꿈의 경제이다. 정보통신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생산성이 급격히 증가했다. 실업이 감소하고 물가는 안정됐다. 국민소득은 빠르게 증가했다. 불황, 실업, 물가 불안에서 소비자들을 해방시키고 무한한 기회를 여는 자본주의의 이상을 구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과연 그럴까? 동료애를 나누며 일을 했던 직장은 생존 경쟁의 전쟁터로 변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혹은 성공을 위해서는 가족, 친구, 이웃을 모두 잊고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 신의와 우정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려야 한다. 신경제는 자신이 파괴되고 가정과 사회가 흔들리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라이시는 이러한 신경제의 이면을 자신에 대한 반성과 함께 정직하게 고발한다. 그는 신경제의 모순을 ‘구매자 천국’과 ‘판매자 지옥’으로 설명한다. 구매자 천국이란 1980년대와 1990년대 통신, 운송, 정보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판매자간의 경쟁을 격화시키고 신상품 개발, 비용 절감, 부가가치 창출 등에서 대혁신을 유발한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좋고, 빠르고, 싼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구매자들이 동시에 판매자들이라는 것이다. 구매자에게 기회를 줄수록 판매자들은 고객을 확보하게 위해 더 힘든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자신들끼리 한편으로 기회를 주고 다른 편으로 싸우는 덫에 걸렸다. 이것이 판매자의 지옥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창의적인 생각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승자의 보상을 받지만 단순직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승자와의 소득 격차가 더 벌어진다. 더 나아가 경제 활동에 대한 변화와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서 교육과 재산수준 등 여건히 유사한 사람들끼리 배타적 인맥과 집단이 형성된다. 그 결과 사회적 불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한마디로 신경제는 생존경쟁, 고용불안, 빈부격차, 사회적 분화 등 자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라이시는 ‘개인적인 노력’과 ‘사회적인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개인적으로는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데 강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돈을 벌기 위해 일에만 매달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없다. 원한다면 가족과 친구, 이웃과 사회를 위해 시간을 할애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일의 구성이나 보상방식이 일에 매달리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무한 경쟁의 와중에서 일을 안하면 삶 자체가 불안해진다. 이렇게 볼 때 사회안전망 구축, 균등한 기회제공, 소득격차와 사회분화 방지 등 갖가지 ‘사회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IMF 위기 이후 많은 고통과 좌절을 겪다가 구조개혁의 딜레마에 빠진 우리 경제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IMF 위기를 겪으며 세계는 냉엄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으며 이러한 생존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창의적으로 경쟁력을 기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자생적인 기술이나 지식의 기반이 없어 언제든지 적자생존의 전쟁에서 무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우리 경제의 현실이다.

우리 경제는 도태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150조원의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구조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또 다른 위기로 나타났다. 구조개혁은 기득권층의 거부와 정치논리에 밀려 용두사미가 되고 공적 자금은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들을 연명시키는 구제금융으로 변질되었다.

최근 세계 경제가 동반 불황에 빠지자 우리 경제는 결국 기력을 잃고 표류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현상은 라이시가 암시한 신경제의 파국을 그대로 겪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신경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풍요를 찾다가 허상만 잡은 우리 경제의 선택은 무엇인가? 물론 우리는 라이시가 제시한 개인적 노력과 사회적인 노력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선택은 과거에 대한 향수라는데 한계가 있다. 신경제의 부작용을 부각시키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처방을 내놓은 셈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대량생산 체제가 근로자들의 불안을 가중시켰지만 이는 결국 경제와 사회발전에 거대한 새 물결을 일으켰다. 이런 견지에서 단순하게 신경제를 부정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새시대의 창조자가 되는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오성호 옮김. 원제 The Future of Success.

이필상(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라이시는…▼

로버트 라이시(Robert B. Reich·55)는 클린턴 1기 내각 4년간(92∼96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로 유학을 떠나는 길에 우연히 클린턴을 만났다고 한다.

대통령 출마전부터 라이시의 이론에 흠뻑 빠진 클린턴 대통령은 라이시의 베스트셀러 ‘국가의 일’(The Work of Nations)을 세 번이나 읽은 뒤 그를 경제 가정 교사로 삼았고 결국 노동장관으로 발탁했다.

라이시는 1992년 정권 인수팀을 이끄는 등 새 행정부의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재임기간 동안에는 대통령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최저임금 인상안 등 법안을 관철시키기 위해 의회와의 일전도 불사하지 않아 행정부내 ‘골칫덩어리’로 불리기도 했다.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던 그는 96년 클린턴 행정부 2기 내각 출범을 앞두고 돌연 장관직을 그만뒀다. 당시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아이들을 돌보고 가족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사직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갑작스런 그의 사임은 신경제하에서의 ‘일’과 ‘삶’에 관한 사회적인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장관직 사임 후 하버드대 정치경제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브랜다이스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치 경제 이슈를 소개하는 격주간지 ‘미국의 장래(The American Prospect)’ 공동 발행인이자 편집인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저서인 ‘국가의 일’은 21세기의 자본주의와 ‘국가’ 그리고 ‘개인’ 관계를 조명한 현대판 ‘국부론’으로 평가받고 있다. 향후 신경제는 창조적 전문직과 기타 직업간의 소득격차가 갈수록 벌어질 것이므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많은 국민들이 창조적 전문직에 종사할 능력을 갖추도록 교육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라는 것이 주요 내용. 이 책은 국내에도 94년 ‘까치글방‘에서 번역 출간돼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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