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 칼럼]누가 그런 상품 사겠는가

  • 입력 2001년 11월 7일 20시 22분


집권세력은 최근 내분과정에서 대외비(對外秘) 사항을 너무 많이 드러냈고 또 그만큼 많은 것을 잃고 있다. 집안싸움 모습이 민심에 어떻게 비쳤겠는가를 물어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일이다. 모두들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에서 잠시 숨이라도 돌리게 돼 다행이라 할지 몰라도 그것은 그들 사정이다. 정작 황당한 것은 민심이다. 당과 집권세력의 결속을 다질 것이었다면 왜 그렇게 핏발 선 싸움을 벌였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의견 조정능력도 없는 세력이라는 것만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황당한 민심이 이번 사태를 보면서 기가 막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 때문에, 누굴 위해서 벌이는 싸움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들어 초점을 흐리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을 그렇게 만만하게 본다는 증거다. 사태의 발단이 재·보선에서 완패한 집권여당의 자성론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이 돼 버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내정과 외치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국정난맥상에 화가 난 민심이 심판을 내린 것이 재·보선 결과라고 자인하지 않았는가. 민심의 내용을 파악하고 응분의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런데 전당대회 시기 공방은 무엇이고, 음모론에 역음모론은 또 무엇이며, 비상과도체제니 통치권 사수론은 이 판에 왜 나오는 것인가. 민심수습은 어디로 가고 대권후보싸움에다 당권장악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이쯤 되면 본말전도(本末顚倒)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끄러워서도 쉬쉬해야 할 집안싸움을 대로에 전(廛) 벌이듯 하고 있으니 역시 기가 찰 일이다. 지금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면 해법의 초점을 당의 결속에 맞추어 내분을 추스르는 데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얼버무릴 공산도 없지 않다. 결과적으로 대권싸움이나 당권싸움이 민심을 흐리기 위한 것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이야말로 음모가 아닌가. 국민을 그렇게 우습게 본단 말인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정권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하나의 큰 이미지로 국민에게 비친다. 지금 정권은 ‘쫓기는 정치’를 하고 있다. 인적쇄신문제를 당당히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뒷걸음치는 모습이 영판 쫓기는 모습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집안 사정을 내놓고 드러낼 형편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당내 일각에서 점찍어서 갈아치우자는 권력 측근 인물들을 결코 버릴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입술과 같은 그들이 없어진다면 당장 이가 시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상황을 아직까지는 피하고 싶을 법하다. 또 마땅한 대체인물이 없다는 판단도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그 형식이야 어떻든 간에 당내 주장을 리더십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밀린다는 것은 더더욱 견디기 힘들지 모른다. 이번엔 넘어간다 치더라도 다음엔 또 어떤 주장을 들이밀지 모른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전체 상황은 해결이 아니라 대치 속의 정돈상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모두 당내문제다. 대권과 당권싸움의 귀결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를 여기서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모여서 절묘한 해법을 찾아낸다 해도 민심의 관심사는 아니다.

상황이 복잡해질수록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아닌가. 꼬이고 얽힌 상황의 맨 끝자락에서 해답을 찾는다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우물쭈물 덮어두고 갈 수도 있겠지만 덮어두기에는 환부가 너무 크다는 사실까지 덮을 수는 없다. 어떤 수습책을 마련하든 간에 그 출발은 당 내분 수습이 아니라 민심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재·보선 결과에서 민심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껴야 했다. 그런 판국에 집안싸움을 벌였으니 집권세력이 내놓을 ‘정치상품’의 질이 어떨 것인지 뻔하지 않은가. 분명히 말하자면 지금 싸움 뒤편엔 내년 대통령선거 지방선거 그리고 국회의원선거에서 ‘나는 당선돼야 하겠다’는 욕망이 깔린 것 아닌가. 그렇다면 더욱 소비자(유권자)를 감동시킬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자성과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여기에 민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다. 집권세력의 정치상품에 금이 가고 맛이 가고 있다는 것을 유권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런 상품을 내놓겠다는 것인가.

<논설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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