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 입력 2001년 10월 26일 18시 22분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김형경 장편소설/전2권 각 318쪽 8500원/문이당▼

책을 읽기 전, 30-40대 여자의 이야기라는 정보를 먼저 들었을 때, 미안하게도 그러니 얼마나 칙칙하겠느냐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 나이때 여자들의 삶이라는 게 뭐 그리 일기 청명하고 바다 고요한 그런 풍경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서른다섯살 먹은, 친구 사이인 두 전문직 여성 세진과 인혜가 상처의 바다에서 긍정과 포용의 새 삶을 수확하는 과정을 세밀화로 그려낸 이 장편소설은 뜻밖에도, <정선아라리>의 가락으로 막을 열고 고비마다 그 가락을 추임새로 쓴다.

“갈 적에 보니는 젖 먹던 아기가, 올 적에 보니는 술 장사 하네…. 앞남산 실안개는 산허리를 감고요, 우리 님 양팔은 내 허리를 감네…. 삽짝을 흔들면 나온다던 사람, 울타릴 부셔도 왜 아니 나와…. 통치마 밑에다 소주병을 차고서, 깊은 산 한중허리로 임 찾아 가네…. 정선 읍내 일백 오십호 몽땅 잠들어라, 지부장네 맏며느리 데리고 성마령을 넘자….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릿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떨어진 동박은 낙엽에나 쌓이지, 사시장철 임 그리워서 나는 못살겠네…. 물결은 출러덩 뱃머리는 울러덩, 그대 당신은 어디로 갈려고 이 배에 올렀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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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이 가시는가? 떠나온 곳을 돌아보기도, 떠나갈 곳을 바라보기도, 어딘지 어정쩡하기만 한 삼십대 중반 여성들의 혹독한 내면을 어루만지는 정선아라리 가락이라니. 김형경은 인간 사이에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오고가는 모든 것들, 혹은 인간과 삶 그 자체가 ‘돌멩이나 들꽃’이 아닐까고, 이제 삶의 질풍노도에서 한발짝 비껴난 관조의 태도로 말한다. “삶이라는 것은 일종의 우연이거나 농담이고, 사랑은 그보다 더 가벼운 무엇”이라는 거다.

그래서 그는“두 팔을 벌려 흔쾌히 눈앞의 통속을 껴안”는다. 그는 통속이 “온몸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의 중심을 관통하는 바로 그 것”이며 “정선 아라리가 매혹적이었던 것도 그것이 통속의 본질을 활짝 펼쳐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나친 엄숙주의, 유교적 허위의식, 그런 것들을 벗고 싶었다. 비가 오면 속살까지 비에 젖고, 햇빛이 좋으면 뼛속까지 볕에 그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 그녀의 눈에 ‘사소하고 가볍게 지나가는 일’이란 없어야 했다. 1.5세때의 기억까지 끄집어내서 ‘나는 나와 모순’되고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내고야 만다. 안정과 성숙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닌 것이다.

평범한 가정에서 모범생으로 자라났지만 폭력적인 남편과 이혼한 뒤 뒤늦게 여성으로서의 삶을 성찰하게 되는 광고회사 간부 인혜. 이혼가정의 냉정한 모성과 무책임한 부성으로 인한 때이른 상처에, 20대 초반의 성폭행 경험이 겹쳐지면서 억압된 분노로 정상적인 삶의 영위에 장애를 겪는 건축가 세진.

대학시절, 각별한 우정이 낳을 수밖에 없는 각별한 배신감으로 헤어졌던 둘이 삼십대 중반 성공한 전문직 여성 모임에서 만나 결국 ‘그래도 사랑이 남아 있다’는 희망적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가 담긴 2천6백매 원고를, 나는 대엿새를 잠 안자고 꼬박 새는 월간지 마감와중에도 단숨에 읽어내렸는데, 그건 내가 특출한 능력의 속독가여서가 아니라 여성의 삶에 정신분석의같은 태도로 천착하는 김형경의 문체가 워낙 치열해서였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이 세상이 남성 중심으로 편성되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깡통도 못 차고 있었을 것들이……”

정신분석의가 “남성 여러분께 한 말씀”하라고 권하자 세진이 뱉어내는 이 분노에 찬 대사처럼, 5천년 묵은 체증이 확 풀리는 듯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어서기도 했지만.

여성작가의 소설들이 대개 구도적이고 무의식의 심연 속으로 파고들기 좋아하는 까닭은, 여성으로서의 존재 기반 자체가 생살을 파고드는 가시방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써도 빠지지 않는 그 가시의 성분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은 ‘소설’이라는 형식의 처방전을 끝없이 써대야 하는 것일 게다.

그중에서도 김형경은 상대적으로 내러티브에 관심을 덜 쏟는 반면 거의 해부학적인 태도로 집요하게 ‘여성 무의식’과 그 속의 상처를 주목하는데,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가장 뛰어난 정신분석의만이 써낼 수 있는 재미있고 생생한 임상보고서라 할만하다. 이 글을 다 쓴지 한시간 뒤면 나는 여행을 떠난다. 그때, 찻속에서 <정선아라리>를 들으며 조금 더 이 소설의 여운을 음미해볼 생각이다.

최보은(영화월간지 <프리미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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