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黨論’에 녹는 나라

  • 입력 2001년 8월 27일 18시 37분


부끄러운 국치(國恥)의 날(8월29일)이 다시 온다. ‘왜 어쩌다 나라까지 망했을까.’ ‘그래, 다시는 나라가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인가. 설마 다시 식민지 백성이 되어 위안부 노동노예가 되고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내몰리지는 않겠지.’ 새삼 잿빛 상념이 꼬리를 문다.

한 일본인이 e메일을 보내왔다. 일본의 우경화를 비판한 나의 칼럼에 반론을 제기하는 혐한(嫌韓)기조였다. 거기 놀랍게도 이런 표현이 있다. ‘조센진은 내버려두어도 저희들끼리 싸우다 망한다. 밖에서 간섭하면 대들다가 망한다.’ 에도시대 이래 내려오는 말이라는 것이다.

치미는 무엇을 삼키고 생각해보니 솔직히 집히는 게 있긴 하다.

▼‘조센진끼리 싸우다 망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태 전 조선 조정도 찜찜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 등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만나고 온 두 사람의 보고는 정반대였다. 황은 필시 왜군의 침략이 있을 것이니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김은 전혀 그럴 낌새가 없다고 했다.

첫째, 왜 그토록 상반된 보고였을까. 둘째, 그런 두 보고의 진위를 가리고 국책에 반영하는 시스템은 없었을까. 역사 기록은 전한다. 첫째, 두 보고자의 정치 계보가 서인(황)과 동인(김)으로 정적이요, 갈등 구조였기 때문이다. 둘째, 보고의 진위를 가릴 수 없었던 것 역시 당대의 다수파 실세(實勢)였던 동인 그룹이 김성일을 감싸고 일사불란하게 ‘당론’을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동인은 ‘위기설로 도탄에 빠진 민생을 더 어렵게 말라’는 식으로 서인을 몰아세웠다.

여기서 세번째 의문이 생긴다. 결국 2년 뒤 왜란이 터져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국왕(선조)은 멀리 의주까지 달아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허위보고(혹은 정탐실패)를 한 김성일과 그의 배후 동인세력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김은 전란 중에도 파워를 잃지 않은 동인의 비호로 벼슬을 지내고 나중에 병으로 죽게 된다.

조국의 목에 칼이 들어오는 판에도 당파가 다르고 당론이 다르면 이처럼 갈려 싸웠다. 적정(敵情)은 하나인데, 거기 대응하는 사람은 제 주관, 당파 입장에서 우긴다. 그리고 당파에선 무조건 지원 사격을 벌인다. 세월이 흘러 거짓 오류가 확인되어도 동아리(당파 계보)의 파워만 유지되면 정치생명은 걱정 없다.

조선조를 골병들게 한 임란, 그 후 310여년이 지나 1910년 8월 마침내 진짜 망국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왜란10년 참혹한 전쟁을 겪고도 당쟁 습벽과 권력정치로 지샌 업보였다.당론으로 뭉치고 맞수 붕당(朋黨)을 이기기 위해 정의도 진리도 도덕도 팽개치고 드잡이 하던 그 시절의 정객들. 저희끼리 싸우다 망하는 ‘조센진’이라 욕해도 항변할 수 있을까?

오늘의 정치는 달라졌을까.

여전히 당론은 국익에 선행한다. 당략이 국무(國務)에 선행하고, 당리(黨利)는 국책을 능가한다. 성명전(戰)의 비중이 의회정치보다 우선한다. 내년의 대권 경쟁이 오늘의 민생보다 소중하고 무겁다. 정의와 진리, 이성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역주의의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다. 지역이 바로 정당이 되고 ‘지역주의 당론’ 앞엔 그 어떤 국익 처방도 해당지역의 입맛에 맞지 않는 한 악(惡)일 뿐이다.

▼잃어버린 국익은 어떡하나▼

1조원 가까이 들인 보령화력발전소가 이용률 1%라는 것에 대응하는 것을 보자. 민주당은 한나라당 집권시 시설도입 계약을 한 것이라고 책임전가에 급급하다. 한나라당은 현정부 출범후 하자가 발생했는데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것이라며 볼멘소리다. 여야가 손을 맞잡고 발전소를 고치도록 하고 프랑스 알스톰사를 옥죄어 책임을 묻고 따져도 잃어버린 국익은 회복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데도 말이다.

당론은 당장 옳고 그름을 입증키 어렵다. 입발림이 그럴 듯할 뿐더러 우기는 이가 세력을 이루고, 거기 지지자가 똘똘 뭉쳐 대항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인지 약인지 드러날 때는 난리가 터진 이후의 먼 미래다. 그런 당론이 틀린 것을 느껴도 침묵하는 정치, 적(상대 정당)이 이로워서는 안되므로 입 다무는 정치, 당론을 따르다 손해본 사람은 평생을 보장하고 거스른 사람은 반드시 불이익을 준다는 조폭식 정치, 이것이 청산되지 않으면 망국 국치는 반드시 다시 올 것만 같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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