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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7월 27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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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세무조사는 아직 관련수사가 진행중이니까 말하기 이르지만 정권초의 빅딜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 관리들조차 해당기업의 자율에 의하지 않았음을 ‘무대뒤’에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1993년 김영삼정부 시절,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대통령의 국제그룹 해체가 위헌이라고 결정함으로써 국가공권력이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기업을 훼손할 수 없다는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을 확인해 준 적이 있다. 그 가르침이 있은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1998년 새 정부의 공권력은 ‘자율적’빅딜을 통해 또다시 법치 위에 존재하는 관치를 역사의 기록에 얹었다. 이번에도 명분은 개혁이었다.
이런 사례들이 존재하는 한 지난주 내내 나라를 소란스럽게 한 법치주의(法治主義) 후퇴논쟁은 필연적 사건일 수밖에 없다. 전대통령시절 4·13 호헌조치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군사정권을 비판한 전력의 대한변호사협회는 사회 곳곳에 사나운 논객들이 논쟁의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이 시대에 감히 ‘법이 뒷받침된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여당의 초기 반응은 “탈세와 불법을 비호하는 일부 기득권층의 법의식부재를 개탄한다”는 것이었는데 직업의 도구가 법이라고 할 수 있는 변호사들을 법의식이 없다고 나무라는 말이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반대시각도 없지는 않지만 같은 장소에서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도 ‘위협받고 있는 법치주의’를 걱정했고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도 결의문에 지지를 표했다는 점에서 여당은 겸허한 자세를 보이는 편이 더 좋았을 성싶다.
논쟁의 단초가 된 개혁은 그 말 자체가 이미 갈등과 혼란의 냄새를 풍기는 존재다. 개혁은 그 결과에 따라 권력자원의 분포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서나 개혁주체와 개혁대상간의 처절한 갈등은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툼의 가운데는 예외없이 법치논쟁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지금 여당인 민주당은 야당시절이던 1993년 5월, 김영삼정부의 사정위주 개혁에 대해 “법치가 아니라 인치(人治)”라며 필사적으로 저항함으로써 정국이 위기를 맞았는데 한나라당의 전신인 집권 민자당이 당시 반박한 글을 보면 가관이다.
‘법제도를 통한 개혁이 당연히 옳은 얘기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법 이전의 결단과 정치력에 의한 개혁이 더 시급하며 법과 제도정비를 위한 논쟁을 벌이다가는 시기를 놓쳐 개혁에 성공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이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관이다’라는 요지다. 세상천지에 그렇게 드러내 놓고 ‘법치 위의 인치’를 시인하고 정당성을 주장한 정권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 여당은 얼마나 순박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정권 아래서도 토를 달지 않던 대한변협이 ‘법대로’를 유난히 강조하는 이 정부 아래서 법치를 들고 나온 기이한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한쪽에서는 법 대신 힘에 의한 개혁을 비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엄격하게 법에 의한 개혁을 강조하는데 분명한 것은 양쪽이 보고 있는 상황은 하나라는 것이다.
‘가장 엄격한 법이 가장 해로운 악’이라는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의 말도 있지만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고 특정인에게만 엄격하게 집행될 때 갈등의 한쪽 당사자는 승복하지 않는다. 특별히 경제분야에 관한 한 개혁의 과정에서 법이, 또는 법정신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됐다고 믿는 경제주체는 드물다.
한 예로 정부가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를 깨겠다며 서슬 퍼렇게 어느 재벌을 하루아침에 ‘법대로’ 분해해 버렸는데 그보다 훨씬 더 큰 부실을 갖고 있는 대마는 국민경제를 고려한 은행들이 ‘자율로’ 돕고 있다면 이건 법치인가 관치인가 인치인가.
그런 사례를 한없이 들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 여당이 법치논쟁에 좀더 겸손해지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차라리 관치가 불가피했던 상황을 국민에게 설득하려는 자세가 좀 더 성실하고 정직해 보일 수 있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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