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송문홍/‘공주병 환자’

  • 입력 2001년 7월 26일 18시 22분


황장엽(黃長燁)씨의 미국방문 문제로 몇 달째 정치권이 소란스럽다. 정부쪽에선 황씨가 미국에 가면 보수성향의 미 공화당 의원들과 어울려 대북정책 기조에 방해되는 발언을 쏟아 놓을까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하다. 반면 한나라당은 ‘황씨가 미국에 못갈 이유가 없다’고 주장한다. 당사자인 황씨도 “한미(韓美) 동맹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방미를 수락했다”고 밝혔다. 황씨 방미 문제는 이제 개인의 인권이 먼저냐, 국가 이익이 먼저냐는 논쟁으로 번져 가는 느낌이다.

▷황씨는 자신의 주체철학으로 북한 체제를 설계했다는 사람이다. 그런 황씨가 97년 2월 북쪽을 버리고 남쪽을 선택한 것은, 북한 체제가 자신의 신념과는 달리 김일성(金日成) 부자를 신격화한 ‘봉건왕조’로 변질됐기 때문이라고 그 스스로 여러 차례 밝혔다. 한국에 온 뒤 북에 남은 황씨 부인은 자살하고 자식은 반신불수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도 있고 보면, 신념을 위해 개인적 불행을 겪은 그가 안쓰럽기도 하다.

▷한국에 온 후 황씨는 저술활동 외에 ‘북한민주화운동’에도 나름대로 애써왔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자기네 ‘수령관’에 꿰맞춰 “인민은 하늘이고 수령은 인민의 어버이다. 고로 수령은 하느님의 스승이다”라고 주장하는 곳이 북한이다. 수령이 하느님의 스승이라고 강변하는 이 희한한 체제가 제거되어야만 전쟁도 막고 평화통일도 이룰 수 있다는 게 황씨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나 북한 전체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기엔 북한 내부 역량이 너무 약하고, 그래서 남쪽을 기지 삼아 북한 민주화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엊그제 한나라당 안영근(安泳根) 의원이 그런 황씨를 향해 ‘공주병 환자’라며 ‘차라리 북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일갈했다. 안 의원의 주장은 당론과는 다른 것이어서 ‘소신발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조롱기 가득한 그의 발언은 국회의원이 한 말치고는 유치하다는 느낌이다. 자기 신념을 주장하는 노(老) 망명객에게 할 말은 아니다. 칼에 벤 상처보다 말로 다친 상처가 더 깊고 오래가는 법이다.

<송문홍논설위원>songm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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