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14]명성황후의 초상

  • 입력 2001년 7월 6일 18시 41분


어떤 인물에 대한 추모의 정(情)은 우선 그의 모습을 그리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남달리 관상과 인상을 중요시하는 한국인들이 얼굴 모습을 그토록 중요시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 그 추모의 감정이 지나쳐 없는 모습을 그리거나 상상이 지나치다면 그것은 추모가 아니라 오히려 고인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명성황후의 초상을 둘러싼 논쟁이다.

우선 사진 (1)을 보자. 요즘의 초 중등 교과서에 명성황후의 어진(御眞·실제 얼굴)이라고 소개되어 있는 사진이다. 이 사진은 황후의 어의(御醫·의사)였던 언더우드 여사의 ‘토미 톰킨스’(1905· 292쪽)와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헐버트 박사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1906·138쪽)에 수록된 것이다.

이 사진은 일본의 소설가인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민비 암살’이라는 책의 표지 그림으로 쓴 이후 사실상 명성황후의 사진인 것처럼 굳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은 결코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다. 그 이유는 첫째, 언더우드 여사나 헐버트 박사가 한결 같이 이를 왕비의 사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더우드 여사는 이 사진을 가리켜 ‘정장한 귀부인’이라 했고, 헐버트 박사는 ‘정장한 궁녀’라고 설명했다. 고종을 가까이 모신 고문과 황후의 어의(御醫)가 아니라는데 이보다 더 명백한 증언은 없다.

둘째, 이 사진을 정밀히 살펴보면 배경이 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원래의 사진에서 몸만 오려내어 배경을 합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의 원판은 어떠했을까? 다행히도 그 원판의 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그것이 사진 (2)이다. 이 사진은 이탈리아의 외교관인 로제띠가 촬영한 것으로서 그의 한국 여행기인 ‘꼬레아 꼬레아니’(1904)에 실려 있다. 사진 설명에는 ‘정장한 궁중 여인’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꼬레아 꼬레아니’의 다른 쪽에는 사진 (3)이 실려 있는데 이 사진은 사진관의 세트로 기생의 옷이 걸려 있다. 만약 이 사진의 배경이 진짜 왕비의 어좌(御座·의자)였다면 거기에 기생의 옷을 올려놓고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사실 이외에 이 사진은 심정적으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국의 국모가 버선발로 다리를 쩍 벌린 채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진은 개화기의 어느 궁녀가 서양 사진관에 출타하여 찍은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사진의 논거가 빈약해지자 나타난 사진이 (4)이다. 이 사진은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미국 망명 시절에 발행한 ‘독립정신’(1910)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다.

아마도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노력한 역사학자는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일 것이다. 그가 이 사진을 보고 미심쩍은 생각이 들어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명성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확인했더니 한결 같이 부인했다고 한다.(‘호암전집’ 3권 95쪽)

문일평의 지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사진은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국의 왕비가 적삼 바람에 사진을 찍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증이 나오자 이 사진이 황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사진이 여염 처녀 시절의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쪽을 찐 것이 분명하니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서 사진 (4)가 명성황후라고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이 사진이 충주(장호원이 아님) 피난 시절의 것이라고 주장하나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왜냐 하면 명성황후가 충주에서 지낸 51일 동안은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던 때여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어느 경황에 사진사를 불러 사진을 찍을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에 명성황후가 충주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은 고종과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 친정 조카인 민영기(閔泳驥) 그리고 궁녀 몇 사람뿐이었다.

이 사진의 진위가 물의를 일으키자 이승만은 해방되어 귀국한 후 이 책을 복간(1954)할 때 전혀 모습이 다른 사진으로 바꿔 낀 것으로만 봐도 (4)는 진짜 모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명성황후의 사진으로 가장 그럴싸하게 설득력을 갖는 사진이 곧 사진 (5)이다. 이 사진은 프랑스 언론인으로서 1895∼97년 베이징(北京) 특파원으로 활동한 라게리라는 사람이 쓴 ‘라 꼬레’(1898)의 표지에 실린 사진인데, 왼쪽에는 대원군(大院君)이 있고 오른쪽에는 고종이 있어서 더욱 설득력을 높여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을 정밀하게 확대해 보면 이는 사진이 아니라 펜화임을 곧 알 수 있다. 라게리가 이 책을 출판한 당시에는 이미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여서 사진을 얻을 수 없던 터라 사진 (1)을 대본으로 해 그려 넣은 것이니 이도 명성황후의 사진이 아니다.

왜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명성황후의 노출기피증 때문이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목숨을 노릴 정도로 서로를 증오했고, 결국 그의 친정 오라버니인 민승호(閔升鎬) 일가는 대원군이 보냈으리라고 추정되는 우편 폭탄을 맞고 몰사했다. 이후로 명성황후의 대인기피증과 노출기피증은 더욱 심해져 근친이 아니면 만나지도 않았고 초상화나 사진을 일절 찍지 못하게 했다.

둘째, 그 당시 서양 문물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은 사진을 찍으면 혼마저 빠져나간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 당시의 선교사들이나 여행가들이 한국인의 사진을 찍으려다 몰매를 맞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진기하게 묘사되어 있다. 한국인들이 스스럼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에 들어 와서 였다.

그렇다면 명성황후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왕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남자들의 기록에는 그의 모습이 전혀 묘사된 바가 없다. 다만 그를 가까이 모실 수 있었던 두 여인의 기록만이 남아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어의 언더우드 여사의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명성황후에게 서양 문물을 소개하고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국의 여행가이자 작가인 비숍 여사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1897)이다. 비숍 여사는 1894∼1897년 극동에 머물면서 네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두 여인이 묘사한 명성황후의 모습은 기이하리만큼 일치한다. 이들의 표현을 들어보면, 왕비이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명성황후의 모습이 우아하고 근엄했다는 것이다. 체형은 수척했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눈빛이 날카롭고 초롱초롱했다.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명성황후의 모습이 비만하고 심술궂게 그려진 것은 악의적이었다. 마귀 할멈처럼 그의 눈을 그린 것은 그를 독한 여자로 표현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외교관들이 그를 ‘여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눈빛을 악의적으로 묘사한 탓이리라고 여겨진다.

결론적으로 말하건대, 민비의 초상화는 없다. 아내를 잃은 고종이 생전에 아내를 그리워하며 그토록 찾았어도 나오지 않았던 초상화가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없는 사진을 가지고 이것이 맞네 저것이 맞네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그런즉 그의 초상은 이상의 몇 가지 묘사와 그의 혼을 담아 화가가 상상해 그릴 일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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