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수군 '탈북일기']"北공안 들이닥칠까 조마조마"

  • 입력 2001년 6월 27일 18시 38분


27일 공개된 탈북 소년 장길수군의 일기에는 은신생활의 불안감 속에서도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열일곱살 소년답지 않은 비장함이 담겨 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 어른스러움도 엿보인다. 그의 일기를 되도록 원문 그대로 날짜순으로 간추려 정리한다. 연도는 모두 2000년.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가족들이 모두 탄내(석탄가스)를 맡고 골(머리)이 터지는 것 같아 죽을 지경이었다. 겨우 옷을 입고 할머니네 집에 들어서 김칫국을 마시고 누우니 집이 빙빙 돌아 밖에 나가 토하고 들어오니 할머니가 눈물을 뚝뚝 떨구며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오늘도 시장으로 출근을 했다. 어제도 돈을 못 벌고 그저 허탕을 쳤으니 오늘은 돈을 좀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꽉 들어찼다. 그래서 학국이와 함께 시장을 돌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한국 사람을 찾는 데만 쏠렸다. 그렇게 돌아다녔지만 오후 2시까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다리는 삶아논 개 대가리처럼 푸뜰푸뜰거리기만 했다.


장길수군의 육필 일기장

우리가 쓰고 그린 글과 그림들을 책으로 출판해서 태양절(4월15일·김일성 생일)날에 팔리게 하여 한국 조선(북한) 중국을 들썩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 책에는 옌볜이란 말이 많이 들어가는데 경찰들이 대수색을 할 것이므로 우리 신변이 위험해질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쓴 글과 그림이 ‘눈물로 그린 무지개’라는 제목으로 출판된다는 들뜬 마음은 걷잡을 수 없다.

밖을 내다보니 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슴에 꽉 들어차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식구들 중에는 나와 삼촌이 제일 나가고 싶어했다. 4층에서 막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우리를 잡아가려는 사람들은 우리 식구들이 배겨내지 못해 저절로 걸어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에 큰어머니(옌볜에서 만난 조선족 교포여인)가 도착했다. 한국에서 그 책(‘눈물로 그린 무지개’)이 많이 팔리고 있는가를 물어 보았다. 팔리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다. 북한의 김정일과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이 만나기 때문에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두루두루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큰어머니는 지금 책이 팔리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여기가 더 안전할 테니까.

시장통을 헤매다 집에 들어서니 식구들이 막 달려나와 공안이 왔다 갔다면서 옷을 다 주워 입히면서 바로 떠나야 한다고 난리가 났다. 갑자기 밖에서 소리가 들려 식구들이 모두 옷장이고 뭐고 구석구석 들어가 30분 동안이나 숨어 있었다. 겁에 질려 이모부네 식구 모두가 안달이다.

밀수배(밀항선)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는 너무나도 힘들 것 같았고 우리 같은 탈북자는 그런 배를 태워주지 않을 것 같았다. 탈북자를 데려가다 잡히기라도 하면 위험성이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또 배를 타고 가다가 감기라도 걸려 넉 달 이내에 낫지 않으면 무조건 바닷물에 처넣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다 고기들의 맛있는 밥이 되고 말겠지. 오 무섭다. 살려고 한국으로 가다가 채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서 없어지고 말겠다. 하긴 자유를 찾아가는 길에서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결의했지.

어쩐지 오늘 저녁은 아버지 어머니 형님이 그립고 그때의 생활이 잊혀지지 않고 내 마음을 끌어간다. 누더기 이불을 덮고 아버지 코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듣기 싫어서 귓구멍을 틀어막던 그 때, 3형제가 한 이불을 덮고 서로 당기면서 빼앗아 덮던 그 때가 제일 행복한 때였고 이제 다시는 그런 때가 있을 것인가. 내 생명과 그 세 사람이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고 바꿀 수 있다면….

<현기득·김정안기자>rati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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