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한쪽 신은 언제 벗나

  • 입력 2001년 6월 11일 18시 27분


정치가와 정치꾼을 분별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나서 양자의 차이점을 논했지만 누구나가 수긍할 만한 답을 내놓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래선가, “정치가란 결국 성공한 정치꾼일 뿐이며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라는 비아냥조의 얘기가 정치가와 정치꾼을 가르는 정답인 양 굳어져 버렸다.

그런가 하면 서양에서는 정치인을 공연히 쓸데없는 걱정이나 하는 사람으로 묘사한 경우도 적지 않다. 겉으로 보기엔 호방하고 시원스럽지만 사실은 소심하며 근심거리가 많은 직업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치인과 세일즈맨’이란 제법 널리 알려진 콩트도 바로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가뭄 고통속 정권욕은 '홍수'▼

어느 세일즈맨이 시골 여관에 들어갔다. 하룻밤만 자겠다며 방을 요청했으나 여관주인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2층 방 하나가 비었지만 바로 그 아랫방에 저명한 정치인이 투숙했으므로 줄 수 없다는 거였다. 그 정치인은 작은 소리에도 잠을 못잘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 아예 윗방을 비워둘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시간에 다른 숙소를 찾기 어려웠던 세일즈맨은 주인에게 통사정했다. 얌전히 잠만 자고 새벽에 떠날 것이며 아래층까지 울릴 만한 소리는 일절 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겨우 주인을 설득해 투숙허가를 받은 그는 그야말로 살금살금 방에 들어가 세면도 않은 채 탁자 옆에 쭈그리고 앉아 영업 실적부터 계산했다. 연필 놓는 소리조차 내지 않은 건 물론이다.

밤늦게 계산을 끝낸 뒤 잠자리에 들려다 세일즈맨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구두를 벗으려고 힘을 주다 한쪽 신이 미끄러지며 마룻바닥에 구른 것이다. ‘아차, 정치인이 깼으면 이건 큰일인데…’ 걱정을 하며 그는 나머지 한쪽 신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벗겨냈다. 그리고 발끝으로 침대까지 걸어가 조용히 시트를 벗기고 자리에 누웠다.

두어시간쯤 지났을까. 세일즈맨은 요란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문을 열어보니 정치인이 잠옷바람에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서 있었다. 놀란 세일즈맨에게 정치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선생, 도대체 나머지 한쪽 신은 언제 벗을 거요. 한 발만 벗어던지고 다른 쪽은 벗지 않으니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단 말입니다.”

정말 같은 이 삽화는 물론 정치인을 조롱하고 비웃으려 만든 얘기다. 쓸데없는 걱정에 사로잡힌 별종 인간들이 정치인이라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원전과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구두 한 짝을 마저 벗어던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잠을 잘 수 있는 그런 정치인이야말로 정치꾼이 아닌 참된 정치가로 보는 게 옳다는 생각이다.

한쪽 신을 신은 채 불편하게 잠들었을지도 모를 다른 사람을 걱정하며 밤을 새는 정치인, 이웃의 소음을 다 참고 들어준 다음에야 비로소 편히 잠자는 정치인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느냐는 얘기다. 백성이 내는 소리가 잦아져야만 안심하되 그들이 내는 소리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는 예민한 정치인이 그립다는 뜻이다.

90년만에 처음 왔다는 이번 가뭄사태에서도 그걸 느낀다. 하늘만 바라보며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민심을 걱정하느라 밤잠을 설치는 정치인이 과연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가뭄 극복에 힘을 보태긴커녕 거북등처럼 갈라진 들판을 가로질러 골프장에 간 여당 어느 고위 정치인의 행동을 보며 국민들은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뿐인가. 낡고 고장난 차를 바꾸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무슨 의지나 과시하듯 번호판을 ‘2002’로 단 야당 정치인의 얘기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킹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던 사람이 부모 묘를 왕기가 서려있는 명당으로 옮겼다는 소식도 그렇고 다른 때도 아닌 가뭄비상시기에 대선후보의 세대교체 주장을 하는 정치인의 의식도 안타깝다.

▼민심에 예민한 정치인 그립다▼

바로 그런 이들 때문에 가뭄극복을 위해 ‘금일봉’을 낸 정치인 명단을 보아도 우리는 감동하지 않는다. 며칠 국회를 쉬며 의원 전원이 가뭄현장에 달려가 물대기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모를까, 그들이 과연 진심으로 국민 걱정을 하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민심에 더없이 소심해 백성의 소리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정치인, 나머지 한쪽 신은 왜 안벗느냐고 묻는 정치가가 오늘 참으로 그립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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