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V커브’ 주역을 기다리며

  • 입력 2001년 4월 29일 18시 54분


“사랑은 이젠 러브(LOVE)가 아니라 루브(LUV)다.”

블랙코미디 연극 ‘루브’에서 강조된 내용이다. 작가는 과거의 전통적인 사랑 ‘러브’와는 다른 파격적인 사랑을 일컬어 ‘루브’라고 이름지은 것이다.

요즘 ‘LUV’란 글자가 신문에서 부쩍 자주 눈에 띈다. 연극과는 무관한 경제 기사에서다. 경기(景氣)순환 곡선을 글자모양으로 나타내 장기침체는 ‘L’, 완만한 회복은 ‘U’, 급속 회복은 ‘V’로 쓴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여러 전문가는 미국경제의 앞날에 대해 L자형 또는 U자형으로 전망했다. 이들은 미국의 올 1분기 성장률이 1%를 밑돌 것으로 내다보았다. 여러 사람이 미래를 어둡게 보기 시작하면 비관론이 확산되는 속도도 빠르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미국경제는 의외로 탄탄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미국 상무부가 27일 발표한 올 1분기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지난해 1분기 대비)로 지난해 4분기의 1.0%보다 좋아졌다. 물론 이 수치는 잠정치여서 좀더 살펴봐야 한다는 신중론도 있다.

미국의 성장률로 미루어 V자형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경제에도 덩달아 청신호가 켜질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 대한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대체로 미국의 GDP 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지면 한국의 GDP 성장률을 0.6%포인트 낮추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래서 미국경기 움직임이 우리에게도 큰 관심사인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경제 기상도에 먹구름이 끼어 있어 한국경제엔 폭풍우가 예견되기도 했다. 불안에 떠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들은 투자를 늘릴 계획을 세우지 않고 있다. 원래의 투자계획을 오히려 줄이는 축소경영 바람이 불 지경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경기흐름을 꿰뚫어 보는 데 놀랄 만큼 날카로운 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기업이 미래를 비관하며 움츠러들 때, 즉 경기저점(trough) 무렵에 큰 공장을 새로 지었다. 그 공장이 완공될 즈음이면 경기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반대로 너도나도 증설투자에 나설 때면 경기정점(peak)이라고 판단하고 오히려 군살을 빼고 체질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이 흐름을 거꾸로 타는 기업은 계속 뒷북을 치다 문을 닫게 될 것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신기록을 세우려면 선두그룹을 이룬 여러 선수 가운데 누군가는 모험을 걸고 뛰쳐나가야 한다. 서로 너무 견제해 등수에만 집착하다 보면 하향 평준화되고 만다.

한국 기업 가운데 지금이 경기저점이라고 판단하고 투자를 늘려 힘차게 뛰어나갈 회사는 없는가. LUV 글자 가운데 V자형에서 주역이 될 기업은 어느 곳일까. 미래를 통찰(洞察)하는 기업인은 누구인가.

걱정스러운 것은 앞으로 치고 나가려는 기업의 발목을 잡는 정부 규제가 또다시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정부는 순자산의 25% 이상을 다른 기업에 출자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규제를 없앴다가 이를 되살리는 등 민간에 대한 칼자루를 놓지 않으려 하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개별 기업에 간여하려는 묵은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미국경제에 나타난 장밋빛이 한국경제에도 채색되기를 기대한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들이여, 앞으로 뛰어나가라.

고승철<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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