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남호/봄에 만난 세가지 아름다움

  • 입력 2001년 4월 22일 18시 35분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만발했던 봄꽃이 조금 지친 모습을 보이는 듯 하더니만,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참새 혓바닥같은 신록들이 나뭇가지마다 매달리기 시작해서 세상이 한층 푸르러졌다. 이제 봄은 그 처연한 뒷모습을 보여주고 그 대신 초여름이 마치 숨바꼭질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신록 또한 눈부시다. 그러나 봄꽃들의 화사함은 너무나 짧아서 행복감보다는 허무감이 더 크다. 더구나 서울이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봄꽃들은 겨우 존재하는 아름다움인 듯해서 더 애틋하다. 해마다 애써 찾아오지만, 찾아올 때마다 있을 자리가 줄어들어 서울의 봄꽃들은 겨우 겨우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올해 나의 봄은 행복했던 편이다. 봄꽃이 아닌 아름다움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3월 중순 나는 거제도를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 거제도의 몽돌해변에서 바라보는 반짝이는 봄바다도 아름다웠고, 노자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꿈꾸는 듯한 다도해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역시 봄바다는 남해에서 만나야 하는가 보다. 그런데 거제도에서 진짜 아름다움은 노자산 자락에 있는 혜양사라는 절에서 만났다.

거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이 있었다. 그 불상은 지금까지 내가 본 불상과는 전혀 달랐다. 표정의 온화함과 의젓함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의상과 연꽃이 칠보로 장식되어 아주 화사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뿜고 있었다.

나는 그 칠보 관세음보살상에 매혹돼 한참 동안 법당을 떠나지 못했다. 혜양사는 불과 25년 전에 지어진 절이지만, 너무나 우아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또 넓은 절마당을 공원으로 꾸며서 사람들에게 가족놀이터로 제공하고 있는 아름다운 절이었다.

올 봄에 내가 만난 두 번째 아름다움은 양수리의 강가에 자리잡은 ‘두물 워크샵’에 있었다. 그 날은 봄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고, 벚꽃이 강 안개의 품에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이 연주하는 브람스와 포레의 소나타가 있었다. 봄비 속의 양수리도 아름다웠고, 양성식의 연주도 절제된 기품과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그런 문화의 공간을 제공하는 ‘두물 워크샵’의 존재는 더욱 아름다웠다.

사재를 털어 지었고, 적자를 감내하며 순수예술의 품격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는 그런 공연장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마른 가지에서 피어나는 화사한 매화처럼 경이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날 공연장에는 관객이 10여명밖에 없었다. 이 아름다운 공간을 버려 두고 사람들은 다 무엇을 찾으러 어디로 간 것일까?

우연히 읽게 된 마르셀 에메의 동화집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올 봄에 내가 만난 아름다움의 하나이다. 프랑스에서 국민작가로 칭송받았던 에메의 동화에 대해서는 그 명성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창작동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번역 출간된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의 동화는 유명한 전래동화들의 매력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장님 개 이야기, 다이어트하는 돼지 이야기, 착해지려고 노력하는 늑대 이야기 등 모든 작품들이 문학의 이상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에메의 동화는 최근의 나의 독서체험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었다. 번역도 훌륭하고, 책도 예뻤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책이 나왔는데도 세상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다. 오늘도 수많은 책과 문학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책다운 책이나 문학다운 문학작품은 찾기 힘들다. 그런 서글픔 속에서 찾은 아름다움이기에 더욱 반가웠다.

이처럼 나는 올 봄에 남들이 만나지 못한 아름다움을 만났다. 그래서 나의 봄은 행복한 봄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씁쓸하고 허무한 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만난 아름다움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이 그 존재를 외면하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있던 언덕을 파헤쳐서 시멘트 집을 짓고, 벚꽃이 피었던 자리를 파내서 길과 주차장을 만드는 사람들은 봄도 아름다움도 백화점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처연하게 떠나는 봄의 뒷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저 봄이 내년에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부질없는 걱정까지 하게 된다.

이남호(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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