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훈/'대마불사(大馬不死)' 언제까지

  • 입력 2001년 3월 29일 18시 31분


하수(下手)바둑을 예로 보자. 주위 를 돌아보지 않고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든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도 포기할 줄 모른다. 결국 말의 덩치가 너무 커져 포기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온갖 희생 끝에 간신히 두 집 내고 대마(大馬)를 살린다. 기쁨도 잠시, 승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와 있다.

집짓기 게임인 바둑과 집 짓는 회사인 현대건설. 정부와 채권단은 29일 빚이 자산보다 무려 9000억원이나 많은 자본 잠식 상태의 회사에 2조9000억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진행된 ‘현대살리기’의 결정판이며 포기할 때를 놓친 ‘마지막 선택’이다.

현대건설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을 굳이 따지자면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니다. 경영진과 정부 채권단 회계법인 등의 절묘한 합작품이다. 채권단은 자구 계획만 믿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지원을 해왔고 회계법인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부실을 눈감아 줬다. 정부는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근본적인 처방을 기피했다.

우리나라 해외 공사 수주의 60%를 차지하고 3000여개의 협력업체가 딸려 있는 회사를 그냥 문닫게 할 수 없다는 정부의 생각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대응이 늘 이런 식이었다는 데 있다. 1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또다시 40조원 이상의 추가 공적자금을 조성하면서도 그랬다. 대우자동차와 부실 은행 처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는 현실론을 내세워 원칙을 외면했다. 부실 대기업에 대한 처리에는 늘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말이 따라붙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시장 시스템에 의해 수익성 없는 기업은 수시로 퇴출되는 상시 구조조정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다짐해왔다. 그러나 약속과 행동은 자주 달랐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대마를 살리기로 작심한 정부의 선택이 ‘최선’이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국민은 하수 바둑을 보는 데 너무 지쳐 있다.

이훈<금융부>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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