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진실’을 알고 싶다

입력 2001-03-25 19:30수정 2009-09-21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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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기수’ 정진석씨(가명·67)는 72년 9월 초등학생 강간살인 용의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는 동안 유치장에서 ‘수난일기’라는 것을 썼다. 그는 이것을 면회 온 형님에게 몰래 건넸다.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기자는 ‘흉악범의 거짓변명’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기사로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 ‘수난일기’는 햇수로 30년 만에 다시 동아일보 취재팀의 손에 쥐어졌다. 일부를 옮겨 본다.

“(‘비행기 태우기’ 고문으로) 방망이로 꽂아놓은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다. 장난하듯이(수건으로 가린 얼굴에) 물을 막 붓는다. 그러나 장OO(피해 초등학생·당시 11세)가 입었던 옷에 대해 알 리가 없다. 또 물을 부었다. 장OO가 신은 신에 대해서도 모른다. 고무신이라고 했다. 물을 부었다. 구두라고 했다. 또 물을 부었다. 누군가(형사)가 ‘짤짤 소리내고 끌고 다니는 것 있잖아’ 하기에 나는 슬리퍼라고 했다. 장OO의 하의를 나는 바지라고 했다. 아니라기에 치마라고 했다. 또 물을 먹였다. 누군가 핫팬츠라고 가르쳐 주기에 핫팬츠라고 대답했다.…아! 아! 왜 죽지를 못했던고. 왜 참지를 못했던고. 이제 나는 강간 살인범이다. 아! 아! 주여! 당신은 아시나이다.”

모진 고문에 의해 ‘짜맞추기 조사’를 하는 장면이 생생하다. 요즘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진범’ 여부에 관계없이 무죄판결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직접증거라고는 피고인의 자백뿐이고, 그것도 가혹행위에 의한 강박상태에서 이뤄진 것이라면 그 진술은 이른바 ‘임의성(任意性)’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씨는 당시 1, 2심과 대법원 재판에서 모두 유죄로 인정돼 무기수가 됐다. 15년을 복역하고 모범수로 가석방된 뒤 또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고희(古稀)를 앞둔 나이. 중풍이 도져 현재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다”고 외치고 있다.

정씨의 진범 여부를 그 자신과 신(神)은 안다. 물론 숨진 장양도 알 것이다. 만약 진범이 따로 있다면 그도 알 것이다. 그 비밀을 캐기 위해 본보 취재팀은 지난달부터 벌써 한달 이상 본격적으로 추적해 왔다.

성과는 상당히 있었다. 정씨를 범인으로 인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당시의 증인들 대부분이 “경찰의 강압적 분위기 때문에 허위증언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최초의 부검의사도 “사망시간(범행시간)에 관한 내 소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취재팀은 증인 등을 실제로 만나보면서 ‘정씨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혹시 정씨와 증인 등이 사전에 짜고 정씨에게 유리하게 ‘짜맞추기 증언’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모저모로 따져 보았지만 그럴 이유와 가능성은 없다는 판단이 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씨가 진범이 아니라고 단정할 만한 결정적 증거는 아직 없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진범’을 찾아내는 것이다. 공소시효가 이미 끝나 형사처벌을 받게 할 수는 없지만 ‘진실’이 뭔지 만은 알고 싶다.

육정수<사회부장>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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