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충식]유언들 남기소서

  • 입력 2001년 3월 23일 18시 36분


‘옛날 제왕들은 죽음을 꺼리는 일로 여겨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그들이 남긴 유언을 살펴보면 제왕의 말투도 아니고, 마음속에 참으로 하고 싶었던 말도 아니다. 숨이 넘어 갈 무렵에야 부랴 부랴 신하를 찾아 유언하게 되니 신하들 마음대로...’

‘왕회장’ 정주영씨 만큼이나 업적도 찬연하고 자식도 많았던 청나라 군주 강희제(康熙帝)의 탄식이다. 중국 대륙을 61년이나 다스린 사상 ‘최장수’ 군주기록을 세우고 스물네명의 아들을 낳았던 황제다.

그렇게 말한 강희제 자신도 유언에 꼭 성공한것은 아니었다. 왜냐 하면 그가 죽고 황위를 이은 네째 아들 옹정제는 ‘유언 조작’ 소문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소문은 이런 것이었다.

▼淸강희제 사후 '유언조작' 홍역▼

임종을 지켜본 것은 신하 한 사람(롱고도)뿐이었다. 침상에 드러누운 강희제는 신하의 손바닥에 14번째 아들을 후계자로 점찍어 ‘十四’를 붓으로 적어 주었다. 황태자들에게 펼쳐 보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네째 아들(후계자가 된 옹정제)에게 매수된 신하가 ‘十’자를 혀로 핥아 지워 버리고 ‘四’자만 남겨 속인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혹자는 신하가 손가락으로 ‘十’자를 가리고 ‘四’만 보이게 했다고도 했다. 또 다른 근사한 입방아도 있었다. 신하가 ‘十’자에 한획을 더 그어서 중국어의 장소를 가리키는 전치사인 우(于)자로 변조, 네째 ‘한테’(于)물려 주는 의미가 되어 정권이 엉뚱하게도 네째 아들에게 넘어갔다고도 했다.

‘황제경영’을 실천해온 정주영씨가 ‘왕자의 난’이 벌어져 기력이 쇠진한 몸을 이끌고 나타나던 때를 생각해 본다. 두 아들의 명운을 건 한 판 싸움에 그가 가신들의 부축으로 겨우 걸어 나왔다. 왕회장이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정도의 총명과 정신력 일까? 다들 걱정이었다.

가신의 전언(傳言)이 후계구도를 갈랐다. 어느 가신 말을 들으면 그룹후계는 동생 에게로 가는듯하고, 다음날 누구말 들으면 또 형으로 뒤집히는 어지러운 형국. 과연 황제의 붓글씨를 혀로 핥아 후계자를 바꾼다는 소리를 실감할수 있었다. 현대 그룹이라는 세계를 무대로 반도체와 배를 팔고 돈을 벌어온 한국의 대재벌, 그 숱한 인재를 거느린 첨단그룹의 운명이 옛 황실의 후계 암투, 그로 인한 동요와 비슷하다는 데야...

다시 강희제의 말이다. ‘군주는 원래 편히 쉬는 바가 없고 은퇴하여 자취를 감출수도 없다. 죽을 때까지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나라를 돌봐야 하는 것이다’.

황제경영의 주역들, 오로지 혼자 힘으로 도전과 시련의 세월을 딛고 이겨온, 독단적 판단과 돌파력으로 내달아온 정주영씨 같은 오너들의 목청 바로 그것이다. 그룹의 사정을 손살피 처럼 아는 재벌오너들은 강희제의 ‘무한 영구책임론’에 공명을 느낄 것이다. 아니, 작은 기업의 창업주라도 마찬가지 일수 있다.

나아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꺼린다. 옛 황제건 21세기의 오너경영자건 주인의식 책임감이 넘쳐 흘러서 ‘재수없는’ 죽음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정주영씨는 백살 넘게 일하고 싶다는 식으로 말한적이 있다. 그러니 그 밑의 후계권에 드는 아들들이건, 나아가 신하건 중역 이사건 사후를 대비하자는 것은 불경 불충이 된다. 주제 넘은 허튼 짓을 삼가고 오직 황제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그러나 황제경영인도 인간이다. 죽음을 회피할 길은 없다. 성경에도 ‘건강해서 80살을 산다해도, 연수(年數)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한게 인생아니던가. 왕회장도 그렇게 떠나갔다.

▼왕회장 지각유언 비싼대가치러▼

왕회장이 그룹내 교통정리와 유언을 미룬 댓가는 너무 비싸게 오고 있다. 그 튼튼하던 그룹이 흔들린것은 정씨 가문과 현대의 자업자득 이라쳐도, 애꿎게 나라와 국민의 부담도 다가오고 있다. 자칫 한국경제에 재앙으로 다가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다.

이 땅의 ‘황제’같은 기업리더들에게 호소한다. ‘유언들 남기소서,미리 미리. 당신의 휘하에서는 결코 못하는 말입니다. 당신과 기업, 나라를 위해 필요합니다’. 삼성그룹의 창업회장이나, 일본의 혼다자동차 창업주가 무책임해서, 노령의 무능을 실감해서 후계구도를 서두르고 일찌감치 유언을 남긴게 아니다. 유언을 서두르고 게을리한 차이가 오늘 삼성과 현대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김충식<논설위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