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커스]암센터 병원장 내정 이진수 교수

입력 2001-03-08 18:29수정 2009-09-2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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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돈 때문에 사는 건 아니라고 말들은 한다. 사실 “돈벌려고 의사가 됐다”는 의사는 만나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서 잘나가던 한국인 의사가 수십만달러의 연봉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고국에 돌아온다는 건 참 신선한 충격이다. 암치료 분야에서 미국 최고로 꼽히는 텍사스의대 MD앤더슨 암센터의 흉부종양내과 분과장에서 이달 개원한 우리나라 국립 암센터 병원장으로 옮겨오는 이진수(李振洙·51)교수 얘기다. 세계적인 폐암 권위자인 그는 지난해초 삼성 이건희회장의 치료를 맡아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교수는 “사람은 나그네 인생이 아니냐”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뜻과 사명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 뜻을 한국에서 발견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지금 한국에는 암에 대한 두려움이 굉장히 많습니다. 환자들은 암을 불치의 병이라고 여기지만 암도 어찌보면 더불어 살 수 있는 질병 중의 하나예요. 오히려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는 만성병인지도 모르지요. 고혈압이나 당뇨병은 평생 약을 먹으면서 살아야 하지만 완치가 안되는데 비해 암은 치료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희망을 갖고 암에 대한 불안감 공포감에서 해방되도록 돕고 싶었습니다.”

기독교인인 이교수는 베드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원하는대로 다녔지만 나이들어서는 허리에 띠를 두르고 사람들이 이끄는대로 다닐 것이다”라고 했듯, 이제는 그런 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서 익힌 선진 암치료기법과 암연구 시스템을 이제는 한국에서 실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스물다섯살 때 어머니를 위암으로 떠나보냈다. 그보다 다섯달 전엔 할머니가 자궁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6·25 때 행방불명되어 얼굴도 보지못했던 그로서는 가장 가까운 두 분을 암으로 잃은 것이다. 어머니는 1년반을 물한모금 마시는 것도 괴로워했다. 서울대 의대를 나와 인턴으로 있던 아들은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 “저렇게 아파하시느니…” 했던 적도 있었지만 눈을 감은 어머니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다. 생명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당신 따님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러 간 적이 있었어요. 앞일을 내다보는 이가 할머니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게 아들에게 좋을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현실적으로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미국으로 떠나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얘기를 하며 이교수는 잠시 목이 메었다. 암으로 저 세상에 간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세계적인 암전문가로 키운 셈이다.

고교 때 읽은 소설 ‘빙점’에 나오는 의사의 모습에 반해 택한 의사의 길이지만 원래부터 미국유학을 작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교수가 “이 얘기는 하지 말자”고 했으나 그는 서울대병원 인턴을 마치고 당연히 들어갈 줄 알았던 수련의 과정을 학생운동에 참여한 ‘전력’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입학한 것도 그가 은인으로 생각하는 김정순교수가 “책임지겠다”고 나선 덕분이었다.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더이상 그를 ‘보호’하기 어려워진 김교수가 “차라리 미국서 공부하고 오라”고 했다. 둘째아기를 가진 만삭의 아내와 78년 여름 무작정 비행기를 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청계천 의료기기상가를 뒤져 분만에 필요한 기구까지 챙겨들고서.

반년 가까이 직장을 못구해 고생하던 그가 가까스로 일터를 잡은 곳은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 세인트조셉 병원이었다. 심장수술 자리에서 수술부위를 양옆으로 벌려 잡고 있는 일이 처음 한 일. 82년엔 MD앤더슨 병원의 펠로우로 자리를 잡게 됐다.

그는 일벌레였다. 네 아이들은 아빠가 밤8시에 퇴근하면 “일찍 오셨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인은 마이너리티(소수)였지만 그를 비롯, 홍완기 노재윤 박사 등 한국인 의사들은 병원에서 마이너리티가 아니었다. ‘코리아 마피아’. 성실과 실력으로 미국인 의사도 어쩌지 못하는 암을 치료해냈기 때문이다.

그에게 병은 왜 걸리느냐고 우문(愚問)을 던졌다. “누구의 잘못도, 누구의 죄도 아닙니다. 담배피워서 폐암에 많이 걸리는건 이미 밝혀진 사실이지만 담배피웠다고 벌을 받는 것도 아니에요. 병을 통해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삶의 새로운 차원에 들어가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인생을 어떻게 생각해야해야 한다는 건지 궁금했다.

“병들기 전에는, 암이라는 선고를 받기 전에는, 누구나 죽음이라는 불치병을 안고 살면서도 자기는 죽음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여기지요. 하지만 병을 피부로 느끼게 되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됩니다. 내가 뭘 해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생각보다는, 매일 하루하루 사는 것을 감사할 수 있으니까요. 정말 ‘굿모닝’의 의미를 깨닫는 거지요.”

그렇다면 그 병은 누가 고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환자인가, 의사인가, 아니면 신인가. 그는 빙그레 웃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린다고 칩시다. 가을에 수확을 하면서 ‘내가 열심히 일해서 이만큼 거둬들였다’고 하면 맞는 말일까요? 적당한 햇빛과 비와 땅의 온기가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질병치료에는 병에 대한 환자의 태도, 낫겠다는 의지,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고 이교수는 강조했다. 종교적인 믿음이라기 보다 환자와 의사의 신뢰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환자에게 의사는 같은 배에 탄 여행안내자와 같은 존재다. 환자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해 불안해 하며 길을 떠날 때, 의사는 그 여정에서 환자가 해야할 일과 장비를 챙겨주면서 저쪽 끝의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빛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다.

폐암 전문인 그가 폐암 예방책으로 일러주는 것은 첫째도 금연, 둘째도 금연, 셋째도 금연이다. 그런 이교수도 10년은 담배를 피웠다. 그가 잊지 못하는 환자도 자신을 금연으로 인도해준 미국인이다. 이교수가 서른다섯살 때 만난 서른일곱살의 폐암환자는 흡연경력 20년이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느냐”고 묻길래 “평균적으로 6개월은 더 살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는데 환자는 열흘만에 세상을 등졌다. “나도 10년 더 피우면 저 환자처럼 될 수 있겠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집안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바깥으로 내다놓고, 애들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금단현상 때문에 애먼 강아지 걷어차고 애들에게 소리지를 수도 있으므로. 이튿날 밤, 정말 못 참겠어서 차를 끌고 담배사러 나갔다. 담배갑을 하나 집어들었는데 아차, 돈을 안갖고 나왔지 뭔가. “돈은 내일 내면 안되겠느냐?”고 했더니 종업원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아 유 크레이지?(당신 미쳤냐?)” 그 종업원도 이교수가 금연에 성공하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세계적인 암전문병원에서 일하던 그의 눈에 이제 시작인 국립 암센터의 ‘환경’이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우선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제약’이 많다. 이교수는 MD앤더슨 병원 옆에는 환자와 보호자가 묵는 호텔이 많다는 얘기를 했다. 호텔비가 병원비보다 싸기 때문. 우리나라와는 반대다. 또 새로운 항암제요법을 적용하려 해도 받아들일 태세가 안돼있다는 지적도 했다. “환자의 자세 말이냐”고 물었더니 “보험공단 얘기”라며 그는 웃었다.

“그럼에도 ‘챌린지(도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암에 걸리면 수술해서 잘라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통념이지요. 다양한 신약과 치료기법이 개발되면서 이제는 수술 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 병원에서 그 틀을 마련해야지요.”

그는 MD앤더슨 병원의 좋은 점 가운데 무엇보다 (의료)소비자를 왕으로 모시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말했다. 암환자가 어느 과를 찾아갔느냐에 따라 치료방법이 달라지는 것이 한국의 현실. 내과 외과 등 기존 임상진료체계와 달리 이곳에서는 위암 폐암센터 등으로 병동을 두어 여러 분야의 의사가 그 환자에게 가장 적합한 치료를 하도록 한 환자중심의 시스템이 한 예다. 의사가 끊임없이 교육을 받도록 해 의료의 질을 높이는 것도 그가 목표로 삼는 일이다.

“암이 정복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조금도 망서리지 않고 “그렇다”고 답했다. 인류가 폐결핵을 완전정복했듯이 암도 적어도 20년 안에 완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내 생전에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암으로 잃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는 것, 그가 한국에 돌아온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였다.

▼이진수 교수는…▼

△1950년 전북 익산출생. 경기중고 졸업

△1974년 서울대의대 졸업

△1976년 서울대 보건대학원 졸업

△1976―78년 거제 지역사회의학 프로젝트 참여

△1979―82년 미국 시카고 노스웨스턴의대 세인트조셉 병원

△1982년―현재 미국 텍사스의대 MD앤더슨병원 흉부종양내과 교수

△좌우명〓성실

△건강관리〓특별한 것 없음. 시간나면 운동.

△식습관〓아침은 과일, 점심은 거르거나 간단하게, 저녁은 포식.

△요즘 달라진 생각〓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보다 어떤 일이 덕(德)이 되는지를 중시한다.

만난사람=김순덕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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