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공기업 개혁 다시 시작하자

  • 입력 2001년 1월 27일 18시 47분


5대 공기업의 부당 내부거래 규모가 최근 2년여 동안 1조원에 육박한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는 단순히 공기업의 방만한 경영 행태를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정부의 개혁정책 전반에 대한 우려와 불신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공공부문 개혁은 자체 생산성 향상이라는 목적 외에 민간부문의 개혁을 밀어붙일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크다. 정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서 노동자나 기업인들을 다그칠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공기업 구조조정의 경우는 민간 기업의 경우와 대칭적인 비교가 되기 때문에 그만큼 진지하게 우선순위를 가지고 추진됐어야 했다.

그동안 공기업의 부실 경영에 대한 꾸준한 지적이 있어왔고 인력 감축, 퇴직금 누진제 개선, 책임경영체제 도입 등 개혁의 가시적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 이면에 놓여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일시적인 대책이나 지엽적인 제도변화를 통해 해결될 것들이 아니다.

▼졸속 추진하다 문제만 키워▼

예컨대 집권층의 정치적 결단 없이는 낙하산 인사가 해소되기 어렵고 민영화에 대한 의지와 일정이 분명하지 않고서는 경쟁원리가 제대로 도입되기 힘들다. 인사나 경영을 외부에서 감시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한다는 인식이 경영진이나 근로자들의 뇌리에 박히도록 근본적인 여건 변화가 필요하다.

아울러 이러한 구조 변화는 반드시 오늘 내일에 종결돼야 할 이유가 없다. 개혁의 내용과 방식이 충분히 합리적이어서 사회적 합의를 구할 수 있다면 몇 년이 걸린들, 정권이 바뀐 들 무슨 상관인가. 오히려 지금처럼 2월 말이라는 시한을 정해놓고 모든 것을 일단락 짓겠다고 하는 것은 개혁의 집행자와 대상 모두에게 ‘시간 벌기’라는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문제는 물밑으로 숨고 눈에 보이는 세세한 각론만 떠오르기 쉬울 것이라는 얘기다.

최근 부각된 5대 공기업 내부거래의 경우 자회사에 대한 부당지원의 규모 자체보다는 임기응변식의 공기업 개혁이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제시되었다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마지못해 민영화에 합의하면서 이면계약을 통해 불법을 저지르는 행위, 가시적인 인력감축 목표에 맞추어 사원들을 자(子)회사로 옮기는 편법 등 정부의 개혁의지를 뒤흔드는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특히 공기업의 부당 내부거래는 시장경제체제를 정립한다는 경제개혁의 기본 목적에 정면으로 부닥치는 행태다. 시장경제의 힘은 공정한 경쟁에서 나온다. 고도성장 과정에서 재벌들의 공로가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경제위기의 주요 원인 제공자로 보는 시각이 많은 것은 불투명한 거래에서 초래되는 비효율의 폐해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방법론상의 논란은 많았지만 나름대로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해결하려 했던 현 정부의 의지를 높이 사주고 싶은 것도 경쟁이 공정하지 못하면 다른 개혁의 성과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세금으로 세운 공기업이 재벌 뺨치는 수단으로 덩치를 키우며 경쟁제한적인 내부거래를 행하는 것은 개혁정책의 뒤통수를 치는 격이다. 아울러 공정거래위원회의 발표가 있은 뒤 기획예산처가 부랴부랴 공기업 자회사 정비방안을 들고나서는 것도 보기에 딱하다.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개혁의 구심점에 대한 의문이 든다는 얘기다.

▼집권층 정치적 결단에 달려▼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공기업 구조조정을 포함한 현 정부의 개혁정책은 기로에 서 있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섰으므로 일을 벌이지 말고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사고가 팽배한다면 이미 이루어 놓은 개혁의 결과마저 원위치로 돌아가기 쉽다. 반면 정권이 바뀌어도 어차피 계속해서 해야 할 개혁이라는 분위기가 잡힌다면 모두들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장이나 재벌체제와 같은 민간부문의 개혁은 정부 방식에 논란과 반발이 따르기 쉽지만 공공부문의 경우는 스스로를 바꾸겠다는 정부의 개혁의지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될 수 있다. 늦었다고 생각되는 현 시점이 얼마든지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해 본다.

전주성(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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