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방형남/부시 취임식의 '그림자'

  • 입력 2001년 1월 21일 16시 25분


조지 W 부시 미국 제43대 대통령의 취임식에 기대가 컸다.

미국 기자는 물론 전세계의 많은 특파원들이 현장 취재를 원했기 때문에 워싱턴특파원도 아닌 한국기자가 의사당 앞에 마련된 취임식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한국대사관의 도움으로 막바지에 겨우 취임준비위원회 미치 맥코넬 위원장 이름으로 된 분홍색 프레스카드를 받았다.

기대감 때문인지 취임식날인 20일 새벽 4시에 잠이 깼다. 눈을 뜨자마자 호텔 객실의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봤다. 19일 오전부터 워싱턴 일대에 계속 비가 내렸기 때문에 무엇보다 날씨가 궁금했다. 대지는 어젯밤 늦게까지 내린 비로 축축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는 낮은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취임식장으로 출발했다. 방송은 2만명 정도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각종 시위에 대비해 연방수사국(FBI) 요원과 경찰 등 수만명이 동원됐으며 모두 16개의 검문소가 취임식장 주변에 설치됐다는 소식을 계속 전했다. 오전 10시경 의사당 주변에 도착해 행사장으로 들어갈 무렵 우려하던 대로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워싱턴에는 거의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날씨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 보슬비에 불과했으나 잔칫날에 뿌리는 것이어서 장대비 못지않게 사람들의 마음을 적셨다. 겨울비를 맞으며 잔뜩 움츠린 채 남의 나라 대통령의 취임식을 기다리는 기분은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다.

오전 11시 무렵 사회자가 새 정부 각료지명자들의 입장을 알린 이후 연단이 서서히 미국의 각계 지도자로 차기 시작했다. 부시의 취임선서를 주재할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부부가 박수를 받으며 입장했다. 이날의 주인공 부시대통령의 부모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 입장할 때도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취임식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행사 도중 또 발생했다. 부시 대통령이 취임사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취임식장에서 멀지 않은 상공에 헬리콥터가 나타나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유권자 투표에서는 졌으나 선거인단수에서 이겨 대통령이 된 부시의 취임에 반대하는 각종 단체와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고 다니는 바람에 경찰 지휘 헬리콥터가 결정적인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취임식장을 향해 소음을 날려보낸 것이다.

미 언론은 이날 시위에 ‘그림자 취임식’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시위대는 ‘당신은 우리의 대통령이 아니다’ ‘도둑’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부시말고 ‘또 다른 주인공’이 있었던 것도 부시에게는 불행이었다. 전임자 빌 클린턴이 새 대통령에게 모아져야 할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뚝 떼어가버린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은 그가 워싱턴의 앤드류스 공군기지를 떠날 때 아쉬워하고, 새 삶의 터전인 뉴욕 존 F 케네디공항에 도착했을 때 기뻐했다. 클린턴은 짤막했지만 호소력 있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쉽게 잊혀질 지도자가 아님을 과시했다.

부시대통령은 취임하는 날 ‘축하’ 대신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숙제’를 물려받았다는 결론을 내릴 즈음 워싱턴의 비는 눈으로 변했다.

방형남(국제부장)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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