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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월 8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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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서울가정법원의 한 법정에서는 자신의 어머니가 중증 치매환자라고 주장하는 딸 A씨(53)가 스스로 ‘정상인’이라고 반박하는 노모 B씨(80)를 상대로 ‘지능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내 어머니의 판단능력은 믿을 수 없습니다. 법적으로 그것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정신의학을 공부했다는 딸은 어머니에게 “‘공책’ ‘채송화’ ‘동전’이라는 세 개의 단어를 순서대로 다시 말해보라”고 시켰다.
A씨는 98년에도 “어머니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법원이 인정해 달라”며 금치산 선고를 신청했다가 기각당한 적이 있다. A씨가 기각결정에 항소하면서 굳이 어머니가 ‘바보’임을 증명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뭘까.
딸 여섯명과 아들 한 명을 둔 홀어머니 B씨는 최근 외아들을 자신이 경영하던 회사 이사장에 취임시켰다. 나머지 딸들은 거액의 재산이 아들에게만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자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어머니가 금치산 선고를 받을 경우 그 이후의 법률행위는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은 정신과 의사의 감정서 등을 검토한 뒤 A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B씨의 판단력이 약해져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고령의 나이에 비해서는 오히려 상황에 대한 이해력이 뛰어나고 건강하다는 것이 이유.
금치산과 한정치산 선고제도는 정신 능력의 결함으로 재산을 낭비해 가족 등의 생활을 어렵게 할 염려가 있는 경우 법원의 결정으로 개인의 재산처분 권리를 제한하는 제도다. 이 선고를 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가족 등 후견인이 법률행위를 대리하며 당사자가 내린 행위를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는 개인의 능력을 제한하는 특성 때문에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멀쩡한 사람을 법적 무능력자나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경우다.
법원 관계자는 “금치산 한정치산 선고가 상속문제 등 재산싸움의 ‘전술’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법원에서도 신청대상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점. 50대 초반의 한 여성은 최근 남편이 알코올 중독증세와 정신병 증세를 보인다며 남편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한정치산 선고를 신청했다. 이에 발끈한 남편과 가족들은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든 뒤 후견인이 되어 재산을 혼자 차지하려는 것”이라며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양쪽이 정신병자 여부를 놓고 법정에서 고성이 오갈 정도로 첨예하게 다투고 있어 사건을 담당한 판사가 직접 정신병원을 찾아가기까지 했지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상태.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도 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할 동안에는 정상적인 사고작용이 가능하다”며 “이처럼 정상인과 심신미약자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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