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리포트]'직장 성희롱' 회사 사규따라 징계…사주관련땐 속수무책

  • 입력 2000년 12월 31일 18시 12분


지난해 9월 한 서비스회사의 매니저로 취직한 이모씨(26·여)는 사장의 ‘과잉 친절’에 치를 떨어야 했다.

사장은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거야”라고 말하며 손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상담실로 불러내 어깨를 껴안기도 했다.

결국 이씨는 입사 열흘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여성특별위원회에 시정을 신청했다. 이씨는 퇴사 후에야 다른 여직원도 똑같은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 경우 현행법상 사장의 성희롱을 제재할 방법이 없다. 형사 처벌은 강제적인 물리력과 신체 접촉이 있을 때 가능하고 직장내 성희롱의 경우 사업주에게 징계를 요구하게 돼 있기 때문에 ‘사장의 성희롱’은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 여성특위는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권고’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진보 진영 내 성폭력사례 실명 공개에 대해 민주노총이 진상 조사 의사를 밝히는 등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지만 제재 조항은 솜방망이에 불과하다.

99년 남녀고용평등법에 신설된 직장내 성희롱 조항은 가해자 처벌보다는 건전한 직장 문화 조성과 예방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경우 뾰족한 해결 방안이 없다.

피해를 본 여성이 지방노동관서에 신고하면 조사를 거쳐 노동부가 사업주에게 가해자 징계를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징계는 회사 사규에 따르기로 돼 있기 때문에 명확한 기준이 없고 징계를 하지 않는 경우라도 제재 조치는 과태료 300만원에 그친다.

노동부는 이러한 법망의 허점을 인정하고 사업주의 성희롱에 대해 곧바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안을 마련, 올해 하반기 시행 목표로 추진 중이다. 또 거래처나 고객에 의한 성희롱도 처벌 대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도 문제.

무역회사에 근무하는 이모씨(26·여)는 중요한 바이어와의 술자리에서 마치 술집 접대부 취급을 받는 모욕을 느꼈다. 다음날 상사에게 항의했으나 상사는 “내가 그런 것도 아니고 업무 밖의 일인데 내가 어떻게 하느냐”고 말할 뿐이었다. 이씨는 민사소송을 검토했지만 “그 정도로는 배상도 별로 못 받는다”는 주위의 충고로 포기하고 말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조중신(趙重信)상담부장은 “외부인 접촉도 당연히 업무의 연속으로 봐야 하므로 상사와 고객을 모두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준석기자>kjs35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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