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나연/'가려는 자와 막는 자'

  • 입력 2000년 12월 24일 18시 29분


경기 고양시 일산동 국민은행 연수원에서는 24일 현재 국민, 주택은행 노조원 1만여명이 나흘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22일 양 은행장의 전격적인 합병발표 이후 국민은행은 차장급까지 농성에 참여했다.

하지만 당초 단기전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던 파업이 예상 밖으로 장기화하자 노조측은 적잖이 당황하고 있다. 준비가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 300여명 수용규모의 연수원에서 1만여명이 지내기란 쉽지 않았다. 복도 계단 등 모든 실내 공간은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이고 많은 노조원들이 운동장에서 한뎃잠을 자며 추위에 떨고 있다.

22일 오후 들어 비까지 내리자 분위기가 급격히 흔들렸다. 일부는 비닐을 머리에 쓰고 꿋꿋이 이겨냈지만 일부는 추위와 허기를 이기지 못해 농성장을 떠나려했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는 단 하나의 출구인 정문은 각목을 든 사수대가 차단했다. 파업대오를 유지하려는 집행부의 선택이었다.

한 여성 행원이 “아이가 갑자기 아파 시어머니가 돌아오라고 계속 전화한다”며 사정했으나 사수대는 “상황실에 가서 집행부의 확인증을 가져 오라”며 돌려보냈다. 한 노조원은 “내가 내 집에 가겠다는데…”라며 사수대와 거친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처음에 한 줄이던 사수대의 대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네다섯 겹으로 두꺼워졌다. 연수원 철문 밖에선 수십명의 은행원 가족들이 안타깝게 이 모습을 지켜봤다. 24일 새벽, 한 여직원은 기자에게 “1회용 렌즈를 끼고 왔는데 렌즈가 찢어져 눈을 뜰 수가 없다”며 “보도차량에 태워 몰래 내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농성장을 나오자 노조원에게 식사를 나르던 트럭이 앞서가다 멈췄다. 뒷문이 열리고 대여섯명의 노조원이 서둘러 내렸다. 농성장을 떠나려는 노조원들은 대부분 연수원 뒷산을 통해 ‘탈출’하고 있다.

한솥밥을 먹던 직원들은 전격단행된 은행합병의 와중에 ‘집으로 돌아가려는 자’와 ‘막는 자’로 갈라져 또 다른 갈등을 빚으며 성탄전야를 보내고 있었다.

이나연<금융부>laros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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