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승철/‘대머리 여가수’는 안된다

  • 입력 2000년 12월 14일 18시 54분


'대머리 여가수'라는 연극이 있다. 무대 위에 머리가 훌렁 벗겨진 여자 가수가 나올까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실망한다. 그런 해괴한 모습의 배우는 끝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도 인내심을 갖고 봐야 한다.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무의미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줄거리다. 대사 내용도 앞뒤가 맞지 않는 횡설수설이 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까지 고도는 나타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한때 주목을 끌었던 부조리극(不條理劇)들이다. 기존의 이성 체계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조리한 세계를 파헤치기 위해 이런 표현방식을 썼다.

요즘 한국경제를 보노라면 마치 한편의 부조리극을 구경하는 느낌이 든다. 여러 경제전문가들은 “한국경제가 살아나려면 구조조정 고삐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 관계자들은 “금융 기업 공공 노동 등 4대 분야의 개혁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현란한 수사(修辭)는 현실의 두터운 장벽 앞에서 힘없이 스러지고 만다. ‘구조조정’이란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지만 ‘조직과 인력 줄이기’가 그 핵심 아닌가. 그러니 일터를 잃을 사람들이 완강히 저항하는 것이다. 은행 부실기업 공기업 정부조직 가릴 것 없이 ‘구조조정’이란 단어에 당사자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이들을 설득하지 않고서는 구조조정이 성공할 수 없다.

외환위기 직후엔 구조조정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정부는 이미 1년 전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면서 축배를 들었다. 공적자금을 대주면서 부실은행을 살렸다. ‘워크아웃’이란 우산 아래에 들어간 부실기업들은 은행지원을 받으며 목숨을 연장했다. 집단이기주의는 리더십이 쇠약해진 정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즘(populism) 방식의 정책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내밀었다.‘고통의 분담’이란 미덕이 사라지는 상황이다.

정책 책임자들의 발언은 부조리극의 대사처럼 국민에게 이해되지 않고 있다. 국민은 불안해지자 허리띠를 졸라맸다. 돈을 쓰지 않으니 물건이 팔리지 않아 상인들은 울상이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도 재고품이 쌓이자 종업원들을 줄일 궁리를 한다. 기업들은 또 내년 투자계획을 세우지 않고 현금을 움켜쥐고 있다. 비관론은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까. 국정을 이끄는 지도층의 언행이 명료해야 한다. 경제논리에 맞지 않는 무리한 정치적 요구를‘민심’을 핑계로 경제팀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단기 인기정책을 버려야 한다. 오늘엔 “개혁을 가속화하라”고 요구하고 내일엔 “무리한 구조조정은 안 된다”는 식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면 곤란하다.

한국경제가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구조조정이란 ‘성인식’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시기는 앞으로 6개월이다.

환자가 고통이 두려워 수술을 거부하더라도 의사는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 물론 수술을 제때, 제대로 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면서…. 더 이상 모호한 부조리극을 보기는 싫다.

고승철<경제부장>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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