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디지털]역사는 삶의 지도

  • 입력 2000년 11월 30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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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삶의 지도다. 지도가 갈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역사는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는 안내자다.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가 있다면 고생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듯이 우리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이 있다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 점에서 역사는 삶의 교사이기도 하다.

역사란 지금의 삶과 무관한 먼 옛일로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시간은 물 흐름과 같이 끊이지 않고 연속된다. 과거는 현재에 와 닿아 있을 뿐 아니라 현재를 거쳐 미래의 삶에까지 연결된다. 현재는 과거와 연결돼 있으므로 과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현재의 참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역사에서는 날마다 바뀌는 현상이 헷갈릴 정도로 교차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구조적 유형이 또한 발견될 수 있다. 역사적 안목이란 이런 구조적 유형을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과거-현재-미래는 연결

모든 경제문제에서도 그렇지만 근래의 석유파동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발등에 떨어진 불만 보았지, 긴 역사적 안목에 따라 정책을 수립하거나 일을 처리하려 하지 않은 것 같다. 1970년대의 오일쇼크와 이번 석유가격 폭등에서처럼 정책입안자들은 일이 코앞에 닥치면 허둥대지만 일단 지나간 후에는 송두리째 잊어버리고 만다. 과거 경험에 비춰 장기적으로 대비하지 않고 일회성의 해결책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통찰력의 부족과 판단의 혼란이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쉴새없이 일어나고 있다.

◇통찰력 부족하면 혼란

똑같은 예는 정치문제에도 발견된다.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되풀이되는 단골 메뉴는 실로 다양하다. 지켜지지 않을 정치적 약속을 남발한다든지, 여야간 합의를 쉽사리 뒤집는다든지, 야당 시절에 외친 주장을 집권당이 돼서는 나 몰라라하고 외면한다든지, 야당이 돼서는 여당 시절의 독단을 잊은 채 오직 여당과의 대결로만 일관한다든지, 야당 시절에는 검찰권의 중립을 외치다가도 집권 후에는 검찰의 ‘정치적’ 활용을 서슴지 않는다든지 하는 등의 일은 그 중 몇 가지에 불과하다.

더구나 정치판을 푸는 열쇠로 여야 정당의 지혜로운 타협을 중시하기보다는 영수회담에 의존하려 한다든지, 언제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것인가가 정당 총재의 결심에 달려 있다든지 하는 것도 국민은 여러 차례 겪은 일이고 그 결과가 언제나 비슷했던 것도 잘 알고 있다.

액튼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권력이란 항상 남용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일상화될 때는 독재가 된다. 모든 집권층은 처음에는 합법적 절차를 밟는 시늉을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력의 합법적 행사 의지(意志) 자체를 버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권력을 장악하고 나면 점차 오만 방자해지고 결국은 세상을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망상에 도취하는 모양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법을 통과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작태는, 간판으로 내세운 민주주의가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먼훗날 꿰뚫어 봐야

한국 정치계는 1960년대 후반부터 20년 가까이 정치적 독선이나 독단을 체험한 바 있다. 모든 형태의 독단과 독선은 결국 그 자체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역사를 돌이켜 보고 긴 안목에 따라 판단하는 현명함이 정치 지도자들에게 있었다면 비극적인 파국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키케로는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일생 어린이로 남아 있게 된다고 말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역사를 길게 보는 안목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직자의 지위가 높을수록,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하는 때일수록 역사적 안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날마다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현상적 관찰보다도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미칠 영향까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구조적 인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삶의 지도이며 인생의 교사이다.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계획하는 위상에 있는 국가 지도층에게 넓은 시야와 길게 보는 역사적 안목이 새삼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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