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왕회장의 교훈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8시 35분


오늘은 현대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86회(만85세) 생일이다. 중동의 모래바람 속에서 청춘을 보내며 오일달러를 들여와 경제개발을 도운 거인이기에 그의 생일은 축하받을 만하다.

자손도 풍성하고 한때 나라를 흔들 정도의 재력을 과시하던 노신사의 생일은, 그러나 여느 때와 달리 올해는 좀처럼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인생무상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병상에서 맞은 올해 생일과 1991년의 희수연, 즉 77회 생일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당시 서울 롯데호텔에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씨 등 500여명의 주요인사들이 건국 이래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대한 희수잔치를 빛냈다. 초청자건 손님이건 피차 이듬해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둔 행사이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정회장에게는 꿈처럼 아득한 추억이다.

생일 직전 겨우 봉합 수순에 들어간 현대건설 사태는 노년의 그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회사 직원들까지 “정주영 회장 부자는 집 한칸, 그랜저승용차 한 대, 그리고 3년치 봉급만 빼고 모두 내놓으라”고 공격하는 모습에서 야박하게 변한 세상의 인심이 읽힌다. 지난 5월 이른바 ‘왕자의 난’ 때는 동생이 형을 문전박대했고 이번에는 다급한 마음에 찾아온 동생을 형이 매몰차게 돌려보내는 장면에서 가족간 불화의 절정을 본다. 정부의 강권에 못 이겨 지원은 이뤄졌지만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형제는 속을 모두 털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창업 53년, 한때 국내 최대 재벌그룹으로 군림했던 현대의 신화가 이렇게 맥없이 무너진 원인은 무엇인가.

정주영씨가 스스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한 것은 13년 전인 1987년의 일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회장이 실제로 곳간의 열쇠를 내놓은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결정은 그 후에도 계속 그의 몫이었는데 심지어 왕자의 난 때는 “내가 법통을 이어받은 진짜”라며 몽구 몽헌 두 형제가 다투어 내민 상반된 서류에까지 왕회장은 모두 사인을 했다. 이미 상황인식 능력을 잃은 불과 반년 전까지 그의 결재는 회사경영상 ‘필수품’이었다.

중소기업이라면 다르다. 그러나 수십개의 계열사가 수천개의 품목을 생산해 수십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재벌그룹에서 총수가 카리스마적으로 모든 결정을 전횡할 수 있는 시절은 그의 건강과 함께 유한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판단력을 유지하고 있을 때 왕회장이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체할 경영시스템을 구축해 놓지 않은 결과가 앞으로 현대그룹에 어떤 형태의 부담으로 더 작용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1995년 현역은퇴를 선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그 다음날 업무보고를 하려던 비서실장을 호통쳐 내보내고 회사일을 후세 중심으로 꾸려나가도록 단호하게 실천한 모습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그는 충청도 산골의 원예연구실에서 지금 버섯탐구에 몰두해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 자손들이 밖으로 큰 소리 한번 나오지 않는 가운데 수성을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상반된 두 경우가 주는 교훈이 있을 법하다.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했던 거대한 전설의 주인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죽음에 임박한 유언에서 장례식 때 자신의 두 팔을 관 밖으로 내놓도록 지시했다. 천하의 권력과 재물을 몽땅 갖고 있던 그조차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실하게 전하려는 뜻이었다. 그렇게 강조되는 지혜지만 그 교훈으로부터 230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권력과 자리에 집착해 인생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를 말해준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자서전을 쓴 왕회장은 정말 책 제목처럼 실패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성공이고 어디부터가 실패인지는 훗날 사가들이 평가할 일이지만 최소한 책을 내던 때까지만 해도 그는 도전적인 제목에 어울리게 실패 없는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곳간의 열쇠를 미리 내려주지 않은 탓에 어느 순간 이후에는 혹 계속되는 시련의 그늘로 성공의 그림자가 덮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오늘 생신을 맞은 풍운아 정주영 전 명예회장의 여생이 편안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그래야 현대가 잘되고 그로 인해 나라도 평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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