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캠퍼스에 부는 '명품바람'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9시 09분


◇L-제너레이션을 아십니까

일명 L―제너레이션(Luxury―generation). 최근 대학생들 사이에서 명품소비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L―제너레이션이라고 불리는 명품족들이 새로운 대학문화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L―제너레이션’란 고가의 수입 정장이나 가방류 구두 액세서리 등의 소비를 일상화하면서 명품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찾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

원래 미국에서는 명품소비를 통해 귀족과 부유층의 소비행태를 모방하는 고소득 여피족들을 일컫는 용어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명품소비의 새로운 주체로 떠오르고 있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이 ‘소비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과거 명품소비를 주도했던 40, 50대들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 백화점과 명품업계에 따르면 최근 국내에서 판매되는 수입명품의 주요 소비층으로 20대의 비중이 크게 늘고 있다.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도 ‘명품관광여행’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영국에서는 바바리 코트, 프랑스에서는 루이뷔통 백, 이탈리아에서는 페라가모 구두….

S여대 인문학부 정모양(21)은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나 용돈을 매달 20만∼30만원씩 ‘명품계’라는 이름으로 모은다. 그러다 ‘계원’ 가운데 누군가 방학 때 해외에 나가게 되면 각자가 주문한 명품목록에 따라 면세점에서 수천달러씩 무더기로 쇼핑을 해온다”고 말했다.

물론 ‘한국보다 저렴하고 최신상품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명분. 하지만 이 때문에 유럽의 명품숍에서는 방학 때마다 한국의 배낭여행족들로 장사진을 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여행사 가이드 H씨(33)는 “역사유적지나 관광지를 생략하고 명품숍 위주로 미리 여행 프로그램을 짜오는 학생들이 많다”고 말했다.

명품은 중고를 쓰더라도 가짜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것이 L제너레이션의 특징.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정보’들이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는데다 대학처럼 좁은 바닥에서 가짜를 사용했다가는 ‘선수들’ 사이에서 들통이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래서 E여대 등 일부대학 게시판에는 ‘한 번밖에 안 썼어요’라며 자신이 사용하던 명품구두 등을 중고로 ‘시장’에 내놓는 광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압구정동의 중고명품숍도 대학생들로 연일 붐비며 호황을 누리고 있다. 이같은 명품열기는 강남과 신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중고생들에게 급속히 전염되는 추세다.

강남지역 여고에서는 프라다나 루이뷔통 가방을 책가방으로 들고 다니는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 이른다. 일부 여학교에서는 선후배간에 루이뷔통 다이어리를 선물로 주고받는 풍속도 급속히 번져가고 있다.

명품열풍에 대해서는 정작 대학생 자신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학생들이 많다. 기성세대의 소비행태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라는 자각도 없지 않다. 요즘처럼 경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시기에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를 잘 알면서도 ‘대세’를 외면하지 못해 따라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연세대 기계전자공학부 손은정양(22)은 “이제는 대학도 이념과 이상이 아니라 겉모습말고는 자신과 남을 평가할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입은 옷에 따라 자신과 상대방의 가치가 판단되며, 브랜드의 고급스러움과 촌스러움이 자신감과 콤플렉스를 상징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이념과 정열의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그 빈자리에 익명의 개인들을 감싼 ‘기호’만이 초겨울 냉기처럼 떠도는 대학 캠퍼스의 씁쓸한 풍속도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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