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아메리칸 사이코>남성의 허영기 풍자한 사이코 킬러

  • 입력 2000년 11월 23일 11시 18분


<아메리칸 사이코>는 소비에 중독된 세대에 바쳐지는 엽기적인 현실 보고서다.

나이 27세에 금융 합병사 P&P의 최고경영자 자리에 오른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천 베일). 그는 이미 완벽한 신체조건을 갖췄으나, 이것만으론 절대 만족할 수 없는 인물이다. 십여 가지의 에센스와 스크럼으로 피부를 매만지고, 100% 실크 와이셔츠와 갖가지 '명품'들로 온몸을 장식한다. 그가 걸치는 옷들은 모두 장 폴 고티에, 아르마니, 베르사체 등의 유명 상표들뿐이며, 일류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만 장신구처럼 달고 다닌다. 참고로 그는 하버드 MBA 출신.

온갖 물질문명의 수혜자인 패트릭 베이트먼은 그러나 제목처럼 '아메리칸 사이코'다. 오프닝 장면에서 자신의 직업을 "살인과 처형"이라고 당당히 밝힌 그는, 뉴욕 여피 사이코답게 도끼를 휘두르며 살인을 즐긴다. 감정의 속살을 드러내는 법 없이, 냉정한 얼굴로 살인을 저지르는 그는 연쇄 살인의 대가 '헨리'와 많이 닮았다. 삶의 계급만 그와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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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음악 평론가에서 여성 연출자로 변신한 메리 해론 감독은 '아메리칸 드림'의 마스코트인 패트릭 베이트먼에게 지성 대신 감각의 옷을 입힌다. 텅 빈 알루미늄처럼 속을 비운 그는 철저히 감각적인 것만을 쫓는 뉴 제너레이션(New Generation) 세대의 대변자다. 이 세대에게 있어 최고의 고민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는 엉뚱하게도, 최고급 식당을 예약할 수 있는가, 명함의 디자인이 최고급인가 여부로, 그들의 고민을 신랄하게 요약한다.

패트릭 베이트먼은 최고급 레스토랑 '도르시아'를 예약하기엔 자신의 권력이 약간 모자란다는 것과 친구들의 명함이 자신의 것보다 훨씬 멋지게 디자인됐다는 것에 쉬이 감정이 흔들린다. 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낙오된 부랑자라도 된 것 마냥.

취미 삼아 혹은 단순한 쾌락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패트릭 베이트먼의 칼날은 결국 자신보다 나은 계급의 친구인 폴 앨런(재어드 레토)에게 향한다. 최고급 레스토랑 '도로시아'를 가뿐히 예약할 수 있는 친구 폴 앨런은 그의 질투심을 극도로 자극하는 남자다. 베이트먼의 질투심을 자극한 이 남자 이름이 폴 앨런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한 부분 중 하나. 폴 앨런은 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설립한 '성공한 미국 남성의 표본'이다.

이밖에도 <아메리칸 사이코>는 숨은 그림 찾기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은밀한 메타포들을 곳곳에 숨겨 놓았다. 베이트먼이라는 이름과 그가 경영하는 회사명 'P&P'는 모두 무심결에 나온 것들이 아니다. 베이트먼(baitman)은 'bait(미끼)'와 'Man(남자)'의 합성어이며, 'P&P'는 'Pierce & Pierce(찌르고 또 찌른다)의 약어.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인 패트릭 베이트먼이 찌르는 데 도가 튼 인물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기성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고민에 휩싸여 있는 한 인물을 통해 뉴 제너레이션 세대의 끝을 불길하게 예언한 이 영화는, 여느 사이코 킬러 영화들과 확실히 구분된다. 아무 것도 가르치려 하지 않으면서 파격적인 메시지를 곳곳에 숨겨두는 솜씨가 바로 그렇다. 이것은 비슷한 엽기 사이코 킬러 영화를 만들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솜씨 이상이다. 게다가 <아메리칸 사이코>는 여성 연출자의 손길을 거친 영화답게 브렛 이스턴 엘리스의 원작을 색다른 페미니즘 텍스트로 바꿔놓았다.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이 영화에 대해 "피에 굶주린 잔혹 소설을 '남자의 허영기'에 관한 영화로 멋지게 탈바꿈시켰다"고 말했다. "남성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면 <아메리칸 사이코>는 분명 평범한 연쇄 살인범 영화에 그치고 말았을 거"라는 뜻이다.

그의 말대로 이 영화는 하룻밤에 두 명의 매춘부를 데리고 자고 여성 부하를 개 다루듯 하는 패트릭의 모습을 통해 남성의 극단적인 허영기가 어떤 사회적 파장을 몰고오는지를 면밀히 보여준다.

20여년 전 <태양의 제국>에서 여린 미성으로 노래를 부르던 꼬마 크리스천 베일이 엽기 사이코 킬러 역을 멋지게 소해화냈으며, <소년은 울지 않는다>의 클로에 세비니,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의 리즈 위즈스푼이 패트릭에게 농락 당하는 여성 역을 맡아 매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아메리칸 사이코>는 악마의 기운을 흡입한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매력을 새롭게 알려줬다는 점에서 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영화다.

황희연 <동아닷컴 기자> benot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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